메이페이퍼 ㅣ 나의 삶은 동화다 ㅣ 07
엄마! 엄마는 하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냐?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글을 쓰고 있던 나에게 딸이 툭 던진 질문에,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과연 내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잘하는 건 뭘까? 수도 없이 몇 년째 나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고, 여전히 그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저 매일매일 나에게 주어지는 다양하고, 무한의 역할을 그때그때 수행할 뿐이다. 이런 식이다.
엄마가 필요해?
앞치마를 두른다.
엄마 놀이를 한다.
이제 나는 아이들의 엄마가 된다.
순간순간 역할을 바꿔야 할 때, 나는 단순한 이치를 나에게 적용시킨다. ‘너는 이제 엄마야.’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나 스스로 엄마임을 인지하고, 엄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쉽게 몰입이 되고, 더 다정하고, 더 사랑스럽고, 더 정성이 가득한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음을 나 스스로 느끼게 된다.
앞치마를 두른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역할에 임하겠다는 나만의 다짐이고, 순간적으로 변신을 위한 의식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역할들은 어떤 옷을 입혀야 할지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그런가, 여전히 헷갈린다. 나의 역할이. 작가였다가, 디자이너였다가. 동화작가였다가, 일러스트레이터였다가, 나도 나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그 혼란은 점점 더해지고 있다.
글을 쓰다가,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가, 글감이 떠오르고,
다시 글을 쓰다가, 동화스토리를 만들고,
동화를 만들다가, 북디자인을 하고.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안이 더 복잡해진다.
글을 쓰는 나는, 그림을 그리지 말라하고,
그림 그리는 나는, 자기를 더 사랑해 달라고 애원하고,
디자인하는 나는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내 안에서 아우성을 친다.
내 안의 동화친구, 스누피는 웃기만 하며 여유를 부린다.
나는 이제 겨우, “나는 근아다.”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이 두 가지 정체성을 찾았고, 나는 이제 겨우 나를 “호주에서 무궁화 꽃을 피우는 한국인 근아”라고 정의 내렸다. 2023년 '학생'이었던 나의 자리가 사라지니, 그새를 못 참고 글 쓰는 나, 그림 그리는 나, 디자인하는 나, … 서로서로 그곳을 차지하겠다고 실제로 내 안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이 와중에 아들은 엄마인 내가 제일 좋다고 하니, 미칠 노릇이다. 내 몸은 하나인데 ‘나'는 여러 개이니, 내 몸이 백개라면 이 모든 나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는 백개의 이름을 부여하고, 그들을 이렇게 키울 것이다.
엄마의 나는 사랑스럽게
아내의 나도 사랑스럽게
작가의 나는 귀하게
디자이너의 나는 톡톡 튀게
일러스트레이터의 나는 컬러풀하게
동화작가의 나는 엉뚱하게
번역을 꿈꾸는 나는 섬세하게
…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역할을 하는 백개의 나를 품고 있는 '진짜 나'는 어디 있는 걸까. 나 조차도, 수많은 역할 속에 숨겨진 진짜의 나를 찾을 수가 없다. 언제부터 숨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진짜'라는 이름을 가진 나를 소홀히 했나 보다.
“진실은 진실 자체로 되돌아간다. 오늘은 이 모습을, 내일은 저 모습을 힐끗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그 모습들이 뒤섞인다.”
소로 (주1)
동그라미에 축구공 무늬를 넣으면, 그 동그라미는 축구공이라는 사물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때부터 그 동그라미는 축구공인 것이고, 그때부터 축구공의 역할이 시작되는 것이다.
동그라미에 사과 꼭지를 그리면, 그 동그라미는 사과라는 사물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안은 맛있는 사과육과 사과즙으로 채워진다. 그제야 사과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동그라미는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을까? 진실을 보여주고 있을까? 동그라미의 모양을 잃지 않고, 축구공을, 사과를 잘 지탱하고 있을까? 축구의 재미를 즐길 수 있도록? 사과의 맛을 뽐낼 수 있도록?
나도 근아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진짜 '근아'로 살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름을 가진 근아로 살았는지는 좀 더 살펴봐야겠다. 진실이 진실되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펴볼 시간이 온 것 같다. 올해 2024년에는 그 진짜의 '근아' 본모습을 찾고, 그녀 스스로도 빛날 수 있게 정성을 다해야겠다.
니체는 '창조하는 자 스스로, 다시 태어날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가 되어야 하고 산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했다. (주2)
진실의 나, 진짜의 나를
다시 낳기 위해,
지금의 나를 먼저
깨트리고,
다시 나를
깊이 있는 글로,
맑은 그림으로,
힘찬 걸음으로,
자연의 풍경으로,
소중한 인연으로
채워야겠다.
그래야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 '여러 명의 나'를
더 잘 도와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더 잘 지탱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의 매력을 맘껏 더 뽐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매일 다른 나로 살 것이다.
하루는 그림 그리는 나로,
하루는 글 쓰는 나로,
하루는 디자인하는 나로.
하루는 이 모든 나의 모습을 섞어서.
내가 이들을 이끌 것이다.
내가 이들을 보살필 것이다.
더 멋진 일을 해내기 위해
함께 성장할 것이다.
사실, 나는 용띠다.
용띠가 용띠해를 만났으니,
도약해야 하지 않을까?
용의 움직임대로,
용의 바람대로,
용의 느낌대로,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만의 용을 마주하지 않을까?
아름답고 용감하고 위대한 용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2024년의 용을 믿어본다.
나를 잘 이끌어주길.
나와 잘 동행해 주길.
바라본다.
2023.1.1 Royal National Park.
사진을 찍고 나니 용의 모습이 보였다.
주1) 소로의 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갈라파고스
주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믿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