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페이퍼 ㅣ 나의 삶은 동화다 ㅣ 06
아래의 두 편의 글을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나의 삶은 동화다. 4화 <연필선 _____ ///// ))))) >
- 나는 호주에서 5살이다. 4화 <여유다, 이런 게 여유지>
지금, 호주에 여름이 있다.
그리고 12월의 첫날을 기억한다.
뜨거웠다!
살이 타들어갔다!
열 히터기 앞에 서 있는 듯,
얼굴과 팔이 따갑게 뜨거웠다.
그날의 해는 자신의 빛이 얼마나 어제와 다른지 보여주는 듯했다. 하루종일 나만 쫓아다니며 나를 귀찮게 했다. 짜증이 나서 인상을 써야 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하늘에 형광등이라도 달아놓은 듯, 유난히도 눈부셨다. 진짜로 어제와 다른 빛을 가진 여름해가 여름하늘에 있었다.
나의 시선이 ‘여름해의 하얀빛’에 꽂혔다.
빛, 하얀색.
맞다! 초등학교 때 빛의 삼원색을 배웠지. 빨강 초록 파랑빛의 색이 모이면 하얀색. 그걸 한국에서도, 심지어 호주에 와서도 못 느끼고 살았는데, 자연을 품은 하우스에 살면서, 여름의 햇빛이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줬다. 자연을 벗 삼으니 자연이 가져다준 선물 같았다.
잠깐, 소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4편을 참조하세요)
소묘를 배울 때, 동그라미를 그린 후, 면을 칠하면 평평하거나 울퉁불퉁한 동그라미가 된다. 하지만 왼쪽 위에서 들어오는 빛이 있다고 가정을 하고, 동그라미 안에 밝음과 어둠, 그리고 그림자를 표현하면 동그라미는 구가 된다.
평면은 빛이 있어 입체가 된다.
입체는 공간을 담고,
공간은 여백을 의미한다.
구를 그릴 때, 아무런 연필선도 그리지 않은 하얀 부분이 가장 밝은 곳이다. 이 부분이 그림의 여백이 되고, 동양화에서는 ‘여백의 미’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림과 여백의 균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평면에 여백을 남기어, 눈에 보이지 않는 입체의 공간을 만들어 동양화의 깊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동화책 안에도 여백이라는 것이 있다. 동화그림 작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글자가 들어갈 공간을 남겨둔다. 실제로 그곳에 글자를 새기기도 하지만, 가끔은 동양화의 여백처럼 하얀 공간으로 남겨둔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들의 상상력으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 여백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책에서는, 하얀색의 여백에 검정 글씨가 쓰여지는 것이라 생각하면, 우리는 그 여백의 공간을 느끼며, 행간을 읽는다. 글자 그대로가 전달하는 내용도 있지만, 그 글자 너머에 또 다른 의미도 포함한다는 뜻이다.
북디자이너의 입장으로서는, 책 내지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여백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페이지 사방에 남겨놓는 공간, 행간 그리고 챕터와 챕터 사이의 공간. 그렇게 책 내지에 남겨둔 공간에서 독자들은 잠깐 휴식하며 작가의 숨은 의도, 메시지, 의미 또는 뉘앙스를 해석하게 된다. 또한, 책을 펼치며 나오는 빈 공간은 독서의 설렘을 더해주고, 책을 다 읽고 덮을 때 나오는 빈 공간은 독서의 여운을 좀 더 느끼게 해 준다.
그럼, 사람들에게도 여백이라는 공간이 있을까? 유일하게 인간들만이 검은 눈동자와 흰자위가 함께 드러난다. 동물들의 눈은 검은색 혹은 다른 색의 눈동자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하얀 여백이 있다. 사람들은 눈빛으로 말을 하기도 하면서 다른 이들과 소통을 한다. 이는 눈과 시선이 만들어 내는 보이지 않는 그들만의 입체적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이 모든 것을 품은 공간이다. 평면과 입체와 보이지 않은 여백의 공간까지. 그리고 우주의 공간까지. 삼원색의 빛으로 하얀색을 만들고, 하얀색으로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자연이 경이롭다.
여백! 나에게는 쉼표와 같은 여유로움의 공간이다. 지난 호주이야기를 할 때, 호주의 여유로운 삶을 여백이 있는 삶이라 했다. 머릿속을 하얗게 비울 수 있는 나만의 상상의 공간에서 잠깐의 쉼을 갖고, 다시 그곳에 나만의 색을 칠해 나만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곳이 나의 여백의 공간이다.
그곳이 지금은 호주다.
호주의 여름날이 시끄러웠던 날,
그림의 여백을 읽으며,
책의 여백을 읽으며,
사람의 여백을 읽으며,
나의 여백을 읽으며,
자연의 여백을 읽으며,
글로 적는다.
그리고 제목을 붙인다.
<여름날, 그날>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날이지만
실제 나에게는 존재하는 12월의 여름날이다.
과거의 내가 경험하고
지금의 내가 기억한다.
과거와 지금을 연결해 주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 있다.
<여름날, 그날>
호주의 여름날이 시작되던 날,
작업실 뒤쪽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눈부시게 찰랑거린다.
반짝이는 하얀 나뭇잎이 알록달록한 초록빛의 그림자를 지녔다.
나뭇잎들이 보내준 여름빛이 작업실 안에서 일렁거린다.
호주의 여름날이 시원했던 날,
동물원에 갔던 특별한 날,
국방색의 호숫가에서 나타난 악어들이 소리 없이 나를 따라온다.
반짝이는 악어의 등이 화려한 다이아몬드의 찬란한 빛을 지녔다.
악어들이 보내준 여름빛이 내 마음 안에서 여유를 부린다.
이 글을 발행한 후,
나의 시, 여름날과는 반대되는
겨울날의 시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한
똑같은 단어와
반대 의미의 단어.
한참을 생각하며 멍해있었다.
갑자기 나는 왜 시같은 글을 쓰고 싶었는지,
릴케의 시가 나에게 말해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그래서,
이곳에 연이어 그 시를 붙여 본다.
강한 자에게 바짝 엎드립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공개 망신을 자처합니다.
저를 혼내러 온 글 같습니다.
소네트
내 생명 속을 뚫고 탄식도 한숨도 없이
새까만 아픔이 떨면서 지나간다.
내 꿈의 정결한 꽃보라는
내 고요한 나날의 축성식이어라.
그러나 커다란 물음이 자주
내 오솔길을 가로지른다. 나는 몸이 움츠러들고
추위에 떨며 지나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숫가를 지나듯이.
그때 슬픔 하나가 내 머리 위로 갈앉아 온다.
때때로 별 하나가 깜박거린다.
빛이 아쉬운 여름밤의 잿빛처럼 우울하여라.
하여 나의 손은 사랑을 더듬는다.
뜨거운 내 입이 찾아낼 수 없는 음향이 되어
나는 기도하고 싶어라......
프란치 카푸스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라이너 마리아 릴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