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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아 Dec 22. 2023

연필선 ------ //////  ))))))

메이페이퍼 ㅣ 나의 삶은 동화다 ㅣ 04

엄마! 나 미술학원 다닐래. 

그 한마디에 시작됐다. 

엄마는, 나에게 딱 맞는 미술학원을 찾아내셨다!

집에서 차로 30분이나 떨어진 그곳을, 

나는 매일 갔다. 

3년 동안. 


그렇게 나의 미술인생은 시작됐다. 






선을 배우다

첫째 날, 4B연필을 잡고 선 연습만 했다. 2시간 동안 4절 스케치북을 선으로만 빼곡하게 채운다. 처음에는 엉덩이를 들썩들썩. 10분마다 일어나야 했다. 참 지루했다. 이걸 왜 하나 싶었다. 


근데 어느새 선 긋기에 빠져서 두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내가 시간을 쓴 건지, 시간이 나를 쓴 건지. 2시간은 느렸지만 빨랐고, 빨랐지만 많았다!


첫 수업이 끝나고 나니, 도화지가 10장!! 

1초에 1줄.

2시간이면 7,200초! 

7200개의 선이다.

내 눈앞에, 

보물이 있다!! 


그 벅찬 감정은 4학년 아이가 감당할 정도가 아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미술 옆에 있게 한 원동력이었고, 내 인생을 미술로 이끌었다. 그 강렬했던 첫날의 기억은 바로 7200개의 선이었다. 


그 성취감에 나는 집으로 갈 때부터 그걸 또 그리고 싶어서, 다시 여길 오고 싶어 했다. 


둘째 날도 선 연습. 

셋째 날도 선 연습. 

한 달 동안 선 연습만 했다. 

직선, 사선, 곡선. 

연하게. 진하게. 그라데이션까지. 


사각사각 소리가 미술실을 채우고

연필은 검은색으로 스케치북을 채우고

도화지는 선으로 내 마음을 채우고

내 마음은 소리와 색과 선으로 가득 찼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다. 4학년의 아이가 연필로 선만을 그어대며 리듬을 탔었다. 연필의 스피드가 점점 빨라지면서 혹은 느려지면서 만들어내는 사각사각 슥슥슥 소리를 꽤나 좋아했었다. 사각거림이 빨라지면 내 손은 더 빨라졌다. 슥슥슥 하면 검정 선이 나타났다. 마술이었다. 


연필소리가 미술실 안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면을 채우다

두 번째 달. 선 긋기 연습이 끝나니, 면을 연필선으로 채운다.

4개의 선으로 네모를 그려, 평평한 면을 채우고, 

3개의 선으로 세모를 만들어, 균형을 잡고 면을 채우고, 

동그라미는? 살살살 짧은 선을 이어 동그라미처럼 만든다. 

동그라미인척 해놓고 면을 채운다. 

삐뚤어진 동그라미라면? 지우개로 문질문질.

감쪽같이 고쳐 놓는다. 

하지만 동그라미의 면은 동글동글해야 하는지, 

납작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면을 채우고 나서, 나는

마법을 보았다! 

검은 4B 연필 하나에서

노랑이 보이고

보라가 보이더니

이내 흰색도 보인다!

이건 결코 마법이지 사실이 아니다!

12가지 색종이도 금세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이제 안다. 검정에도 리치블랙, 쿨블랙, 숯블랙 미드나잇블랙 등 다양한 검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검정 안에 노랑도, 보라도, 하양도 있다. 색을 가지고 논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이 놀이에 흠뻑 빠졌고, 나는 그렇게 점점 미술인생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지금도 찐~~~한 검정은 칠하지 못한다. 현존하는 검은색에서 가장 검은 블랙은 빛과 에너지를 흡수하는 반타블랙(주1). 누군가는 블랙홀의 블랙이 가장 검다고 하는데. 아직 그 우주의 검은색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가, 진한 검정이 나에게는 가장 어렵다. 





입체를 만나다.

세 번째 달. 이제는 입체다!. 평면에서 입체로 진화한 것이다. 

네모로 정육면체를 만들고, 

세모로 삼각뿔을 만들고,

동그라미로 원기둥을 만들고, 

그 아래, 

그라데이션으로 그림자를 만든다. 

입체가 평면을 다시 만났다.

입체와 평면이 짝꿍이 됐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고, 

면이 입체가 되고, 

점선면이 아름다움의 상징 비너스가 되고,

위대한 청년 다비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소묘를 즐긴다. 즐기니 사랑까지 한다. 중고등학교 때 미술실에 들어가면 연필냄새가 났다. 친구들 작업복에서 나는 그 쾌쾌한 흑연의 먼지향조차도 참 좋아했었다. 연필을 깎을 때는, 나무 향이 내 손에 진하게  묻어났다. 나는 그 모든 연필의 향이 그리워, 여전히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칼로 연필을 깎는다. 


그런데 난 여태 내가 왜 소묘를 좋아하는지 잘 몰랐었다. 그리고 왜 소묘를 그토록 오랜 기간 배워야 하는지도 잘 몰랐었다. 그저 예중, 예고, 예술대학을 위해서? 그렇게 9년을 보냈지만 나는 이제 살며시 소묘가 나에게 일깨우려는 진리를 아는 듯하다.


하루하루, 경험이라는 점이 선처럼 연결되고, 그 선과 면에 나의 정신, 혼이 담겨 다차원적인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 정근아도 하나하나의 경험이 쌓여, ‘나이’라는 숫자와 더불어 나의 정신이 자리 잡고 혼이 맑아지며 ‘정근아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나의 프로필로 ‘소묘로 그린 나’를 보여줬었나? 이런 오묘하고 절묘한 우연은 나의 본능 속에 담긴 흑백 소묘의 진리를 나도 모르게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예술가여, 이곳에 서서 이 꽃을 스케치하라. 

늘 그렇게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각 기관의 영탄할 만큼 치밀한 조직, 동물이나 인간과 마찬지로 그 당당한 변화의 특징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술가인 동시에 식물학자이어야 하며, 그리는 동시에 연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행위 자체가 아름다워진다. (중략) 소묘를 할 때, 흑과 백이 필요한 것처럼 인생에서도 심미적인 의미에서 선과 악의 대칭을 필요로 한다.” 

- 로댕 (주2) -


로댕이다! 중, 고등학교 때, 그의 책을 귀중히 생각했더라면, 소묘시간을 더 의미 있게, 좀 더 깊은 연구가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렸던  비너스에게도 생명을 넣어줬을 것이고, 다비드가 가진 위대함의 철학적 의미도 알았을 것이다. 흑백으로 만들어지는 디자인에 더 관심을 뒀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일찍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검정!

여러 색을 담고 있는 검정! 

그것에서 인생을 배운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여러 색을 품고, 하나의 색으로 표출될 뿐이다. 

그저 검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나의 여러 경험 또한 정근아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겠지만, 

그 이면에는 내 이름을 대변할 수 없는 다양한 가치가 숨어있을 것이다. 

나의 숨은 가치는 나의 다양한 매력을 표출하는 그림들의 밑그림이 될 것이다. 


이제 연필그림을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Copyright 2023. 정근아 all rights reserved.



(프로필에 그려진 내가 너무 사랑스럽다. 미소가 더 커진 듯 보인다. 활짝 웃고 있다.)













주1) 나노기술을 이용해 개발한 새로운 색상 소재, 99.965%의 빛 흡수되어, 빛의 반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시각적으로 거의 인지되지 않기에 물체의 굴곡을 인지하기도 어려울 수준의 검은색으로만 보인다.

주2)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프랑스의 조각가, <생각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작품은 <지옥의 문>이라는 조형물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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