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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시간을 가져볼래?

호주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딸에게 전하는 편지

by 근아


호주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딸에게,



선호야~ 요즘 엄마가 [엄마/아빠의 유산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는 거 알고 있지? 엄마도 그 공저 프로젝트에 위해 한 통의 편지를 쓰기로 했어. 그리고, 지난 화요일 어떤 주제로 써야 할지 결정했단다.


그 이야기를 여기에 잠깐 적어볼까 해.




지난 화요일, 너의 마지막 고등학교 행사였던 상장 수여식이 열렸잖아.


행사 프로그램 리플릿을 펼쳐보니, 너의 HSC(주) 성취 기록이 자세히 적혀 있더구나. HSC 6개 Band(과목) 중 5개에서 1등급을 받은 사람은 너뿐이었어. 이 사실은 지난해 시드니 지역 신문에도 발표되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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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장 수여식 당일, 엄마가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있었어. 바로 네가 최종적으로 학년 1등을 차지했다는 것이었지. 물론, 학교 내신과 HSC 점수까지 합친 ATAR 점수 기준으로는 전교 4등이었지만, 5개 과목에서 1등급을 받고, ATAR 점수까지 균형 있게 높인 사람도 너뿐이었어.


유학생이라는 조건 속에서도 공부뿐만 아니라 미술과 의상디자인 실기까지 최고의 성취를 이뤄낸 네가 정말 자랑스러웠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교가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노력하며, 시간과 생활을 철저히 관리해 낸 점이 더욱 대견했었어. 그 결과로 대학교에서 유학생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학금까지 받고 입학을 했지.


이런 너의 성취를 확인하는 날,

무대에서 두 번이나 상장을 받으러 올라가는 모습,

당당하게 걸어가 교장 선생님과 악수하는 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단다.


그 순간 네가 얼마나 빛나 보이던지,

너도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듯했어.


지난 1년 동안 네가 흘린 땀과 노력의 결실을 마주하니, 엄마도 모르게 울컥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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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으로서 당당하게,

너의 존재감을 그대로 보여주며,

후배들에게는 훌륭한 롤 모델이 되어,

반짝반짝 빛나던 너.



이렇게 6년간의 하이스쿨 과정을 훌륭하게 마무리했으니,

다가올 대학 생활도 잘 준비해야겠지?



하지만 엄마는 4년간의 대학생활뿐만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질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며 너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단다. 네게는 아직 생소한 언어와 조금은 낯선 개념일 수도 있지만, 천천히 읽어봐 주겠니?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중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겠지?


그렇다면, 그 ‘넓은 세상’이 너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조금 더 큰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지구의 모든 나라를 포함하는 글로벌한 세계일 수도 있고,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 사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제 성인이 되어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네가 마주할 세상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확장된 공간이 아니라,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낯설고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일 거야.


너에게 익숙했던 세계와 대비되는, 아직 알지 못하는 ‘그 나머지의 세상’ 말이야.


그렇기에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네가 성장하려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는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 시간을 통해 너는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될 것이고, 결국 네가 나아갈 방향도 선명해질 거야.



그렇다면, 사유란 뭘까?

‘사유(思惟)’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야.


思(생각할 사) –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
惟(생각할 유) – 신중하게 헤아리고 숙고하는 것.


사유는 본질을 탐구하고 철학적으로 숙고하는 것을 의미해. 감정, 경험, 가치관을 포함한 넓고 깊은 생각이기도 하지. 우리는 삶의 의미를 고민할 때, 예술을 바라볼 때, 철학적 질문을 던질 때 ‘사유’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해. 이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사고(思考)’와는 결이 조금 다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사유는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는데,

‘생각’이란 무엇일까?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어.


‘인식’과 ‘의식’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경험을 쌓아가지.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며 쌓인 것들은 '인식'이라는 형태로 우리 안에 저장된단다. 이것들은 마치 거대한 도서관처럼 쌓여 있으며, 때로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꺼내어 쓰기도 하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해. 그러니까, 이러한 인식은 과거의 기록이고, 그것은 우리가 걸어온 길이며, 지금의 나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삶은 단순히 과거의 축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순간,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생각을 떠올리거나 전에 없던 영감을 얻기도 하지. 이는 '의식의 바구니' 속에 담긴 것들이야. 마치 바람처럼 불현듯 스며드는 이 생각들은 과거의 경험과는 다른 차원에 있어. 그것은 미지의 영역이며,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한 세계란다. 그것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이기도 해.


그렇다면 과거에 저장된 인식과, 불현듯 다가오는 미지의 세계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바로 '사유(思惟)'가 그 다리를 놓는 거지.


사유는 과거의 경험을 반성하고, 현재의 자신을 성찰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이야. 그러니까 사유는 단절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다고 할 수 있지. 우리가 과거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면서도, 무작정 미래로 내던져지지 않도록 돕는 거지. 그러니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이 '사유'이겠지?


이 다리를 통해 너는 '지나온 너'와 '다가올 너'를 연결할 수 있을 거야. 그저 과거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지. 그렇게 우리는 인식과 의식의 바구니 사이를 오가며, 더 깊이 사고하고,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거야.




하지만, 엄마는 여기서 사유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싶어.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유는 깊이 사고하고 성찰하는 과정이고, 단순한 연상이 아니라 깊이 탐구하고 숙고하는 과정이라는 점이 핵심이야. 하지만 엄마는 여기서,


과거에서 미래로의 연결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유(思惟)’라는 개념을 조금 바꿔보고 싶어.


엄마는 ‘생각할 유(惟)’ 대신, ‘흐를 류(流)’를 사용해볼까 해.

즉, ‘사유(思流)’ – ‘너의 생각의 흐름, 마음의 흐름을 잘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거지.


의식적으로 너의 무의식적인 흐름을 따라가 보는 것.

이 과정을 통해 가장 먼저 너는 너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했고,

데카르트는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존재한다'라고 했지.

그리고 에머슨은 '위대한 사상은 강물처럼 흐른다'라고 했단다.


결국, 엄마가 가장 먼저 너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그 ‘사유(思惟 + 思流)’였어.


때로는 인위적으로 생각을 끌어내기보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이 더 중요한 순간이 있거든. 억지로 의미를 찾기보다, 흐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거지.


엄마는 네가 스스로에게 사유(思惟 + 思流)의 시간을 줄 수 있기를 바래.


네 생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네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보면서,

너만의 길을 만들어가기를.






다음 편지에서는 사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과, 사유하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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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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