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국여행 EP.08
런던 1일차, 오전
숙소에 들어와 잠시 숨을 고르며 짐을 풀었다. 온 가족이 차례로 샤워를 하며, 긴 비행 여정의 찌뿌둥함을 씻어냈다. 그리고 영국의 날씨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제야 정말 영국의 하루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영국에서의 첫 아침, 무엇보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다름 아닌 ‘아침 식사’였다. 30시간이 넘도록 서양식 기내식과 간식만 먹다 보니, 따뜻한 쌀밥 한 그릇이 그리워졌다. 의무감이 들기도 했다. 어쩐지 마음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밥을 찾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숙소 근처, 걸어서 5분 거리에 한식당이 있었다.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가 천천히 길을 나섰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수퍼에 들러 간단한 장을 봐오기로 했다.
이제 영국에서의 ‘의식주’가 해결된 듯,
비로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진짜로, 영국 여행의 시작이다!
그런데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나는 이번 여행에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고 왔기에, 일단 딸아이가 구글 지도에 저장해둔 ‘가고 싶은 곳 리스트’ 중에서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을 선택하기로 했다.
빅벤!
그래, 가자!
영국의 언더그라운드,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Notting Hill Gate역에서 Westminster역까지.
Westminster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올라서자마자,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내 눈앞에 ‘그것’이 나타났다.
순간, 숨이 막힐 듯했다.
“와, 빅벤이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던 감탄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삼켜야했다.
30년 전 영국 방문시에는, 빅벤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저것이 빅벤이구나’ 하고 멀리서 확인했던 기억뿐. 사진 속에서, 영화 속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그 빅벤.
그러니, 실제로 눈앞에 선 그 모습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고개가 저절로 들리고, 입이 절로 벌어질 만큼 — 그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 느꼈던 웅장함이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다. 사진 속에서는 도무지 다 담기지 않는, 고딕 양식 건물의 섬세한 디테일들. 빛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음영과 조각 하나하나의 깊이가 눈으로 보는 순간마다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가 어느새 장대비로 변해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사진 촬영을 마무리하고, 오늘은 일단 실내 공간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 순간!
시게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맞다. 종소리!
시드니 시청 앞에서 듣던 종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빅벤의 거대한 탑과 건물 전체를 통과해 울려 나오는 듯한, 묵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이었다. 그 첫 종소리가 공기와 빗줄기를 흔드는 순간, 마치 내 마음의 시간 자체도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 묘한 정지의 감각.
비로소 ‘지금’을 듣는 듯했다.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빅벤과 함께 ‘존재했던’ 그 순간.
종소리가 멈추고, 나도 멈춤에서 풀려났다.
얼음땡 놀이가 끝나듯,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비가 쏟아진다..
우산 없이 걷자, 머리 위로 떨어진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갑지만 생생한 감각 — 마치 현실이 나를 다시 불러내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빗속에서 한참을 걷다 마주한 공원.
조그마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동상을 마주했다.
누구의 동상인지, 어떤 이유로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동상을 바라보는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다니엘의 동화를 위한 일러스트를 작업하던 때와 순간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사람이다. 런던출생. 그런 그의 동화 속에 동상이 등장한다. 나에겐 - 나의 경험속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생겨난 -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기에 나는 그 장면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한참을 막막해 했다. 수많은 사진을 찾아봐도, 그가 표현하고자 한 ‘그 느낌’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동상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아, 바로 이거였구나...
동화 속 배경이 한눈에 그려졌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내가 빗속을 걸어 이 공원에 들어온 이유를.
동화가 나를 이끌었구나.
나와 함께 걸어온 여러 동화들이
결국 나를 영국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여러 꿈들의 생명력을,
나는 그날 비로소 마주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꿈을 만나러 영국에 가다> 브런치북은 월, 수, 일요일에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