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하루 1
한 2주 전인가, 만난 지 오래된 선배를 만나기 위해 홍대입구로 갈 일이 있었다. 젊음의 거리인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개성 넘치는 복장과 인상을 가지고 걸어 다니는 모습이 만연했고 나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뜬금없이 휠리스를 탄 8세가량의 어린이를 보았다. 내가 8살 때 유행했던 바퀴 달린 신발이 다시 유행하는 것도 신기하고 해서 선배에게 "요즘에도 저런 게 유행하네"라는 말을 건넸고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응. 요즘 사람들이 저런... 바퀴 달린 신발이랑 전동 휠 같은 거 많이 타고 다니더라고."라고 답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였지만 나는 무언가 이상한 부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일련의 사고를 거치고 나서야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선배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내 사고 안에서 휠리스를 타는 사람은 어린이들이라는 것'
이 그 이유의 전말인데, 그렇다면 이상한 포인트는 두 개로 해석될 수 있다.
1. 성인들도 휠리스를 신고 다니는가
2. 그게 아니라 아동이 휠리스를 타고 다니는 것인데 선배는 아동을 어린이나 애들이라거나 하는 단어로 구분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대명사를 통해 지칭한 것인가
아무래도 성인들이 휠리스를 신고 다닌다는 기사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고 그 선배라면 분명히 딥한 생각을 통해 사람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 것이므로 후자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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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는 굉장히 쓸데없는 고민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나이가 많던 적던 사람을 사람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저런 일련의 사고 끝에 도달한 결론은 다름이 아니라
'나는 졸라 나이주의에 찌들어 있구나'였다.
나이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이주의라는 게 별 게 아니라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비슷한 개념으로는 청소년혐오나 아동혐오 등등이 있다. 뭐 차별이나 혐오 같은 단어들을 쓰면 사람들은 보통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 반작용으로 그런 단어들에 대해 광적인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예를 들면 여성혐오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괜한 트집을 잡는 프로불편러라고 몰아간다거나).
그러나 가부장제와 나이주의와 자본주의로 점철된 우리 사회에서 '혐오하지 않기'는 무척 어렵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어쩔 수 없군요! 우리 모두 혐오를 합시다!"가 아니라
인 것이다. 뭐 어린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모두 아동혐오인 것은 아니지만, 그런 단어를 씀으로써 나이 어린 사람을 사람이 아닌 다른 객체로 보고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분명한 혐오이다. 또한 나이 어린 사람들이 주로 가지는 특성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나는 어린애들이 우는 게 싫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성인의 기준에 맞추어 모든 것을 생각하기에 벌어진 혐오라고 할 수 있다. 단어 선택이나 우리의 언어에 관계된 이러한 혐오의 법칙은 여성,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이주여성, 청소년, 성소수자 등등 거의 모든 소수자에 적용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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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고 보니 꽤나 어렵다. 혐오하지 않는 삶이란 일단 예민하게 불편함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부분을 배려하거나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의 언행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으며 나 역시 잘난 척하며 적어놓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혐오를 저지르며 살았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서두의 대화는 의미를 가진다. 작은 일상에서부터 불편함을 찾아내는 것이 혐오의 해결의 첫 단추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첫 단추를 꿰는 것보다는 마지막 단추까지 예쁘게 채우는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