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하루 2
누군가는 여성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존 버거
그리고 누군가는 페미니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마리 시어
또한 2017년 한국의 페미니즘은 이렇게 표현된다.
그리고 주장한다.
2017년 한국의 페미니즘은 '다시 만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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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4일, 소위 태극기 집회라고 불리는 탄핵 반대 집회와 촛불 집회라고 불리는 탄핵 촉구 집회가 반목하고 있는 중심인 청계광장에서 진행된 여성의 날 기념 페미니즘 문화제 '페미답게 쭉쭉간다'는 이러한 목소리의 집합이며 혐오와 비하로 얼룩진 '여성'이라는 인류에 대한 재정의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집회에 나가지 않았고 운동이라는 것과는 사소한 벽을 쌓고 살고 있던 내가 이 문화제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일단 오랜만에 집회의 공기를 마시며 휴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재학 중인 대학생의 기분을 느끼고 싶었고(실제로 나의 대학생활의 7할은 운동과 집회였기에), 강남역 10번 출구와 여성 대통령의 과오가 불러온 극한 여성 혐오를 이겨낸 2017년의 페미니즘의 면모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화제 참가는 아무래도 무뎌진 나의 감수성을 다시금 날 세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하여튼 이러저러한 이유들과 함께 나는 종각역 6번 출구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계광장을 찾지 못해 길을 헤매다가 결국엔 위밍업의 느낌으로 익숙한 광화문 광장에 들어서기로 했다. 토요일의 광화문은 요약하자면 슬프고, 활기차고,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가득했기에 역시 나도 일말의 비감이나 미소 등등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다. 눈에 띄는 점은 세월호를 의미하는 노란 풍선,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하는 보라색과 핑크색의 풍선, 아마도 사드 배치 반대를 주장하는 파란색 풍선 등 가지각색의 풍선이 가득했다는 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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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착한 시점은 대충 3시 반쯤 되는 시간이었는데, 한창 래퍼 '슬릭'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정당한 분노가 가득한 랩을 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의('그'라는 표현을 썼지만 여성이다. 원래 그녀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화려한 플로우와 무대매너도 눈을 떼기 힘들 만큼 대단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낯선 분위기에 약간 얼어있던 내가 적응하기 힘들 만큼 그들은 자신의 감정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고 누구보다 활기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회라기보다는 새내기 때 갔던 청춘페스티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상들이 가득했고, 그래서 결국엔 나는 그 분위기에 완전히 융합되지 못했지만 이 문화제의 필요성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요는 여성들-여성이건 어떤 소수자이건-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수 있는 공간을 그동안 이 사회가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딱딱하고 꾸며낸 표정이 아닌 자연스럽고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그들은 가장 아름다웠다.
각종 단체에서 마련한 부스들에서는 그동안 들어왔던 거지 같은 말들(예를 들면 넌 다리가 못생겼는데 왜 치마를 입어? 라던가 여자답게 머리 좀 기르면 안 돼? 라던가)을 송판에 적어놓고 깨버리는 이벤트, 브라보관소 등등 각종 창의적인 행사가 가득했다. 문화제 참가자들의 옷과 가방에 달린 배지들은 앞서 말한 다섯 개의 의제들을 위트 있게 표현하고 있었다. 슬릭의 공연이 끝난 뒤에는 준비된 발언자들이 의제에 대해 논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낙태죄, 장애여성과 출산, 월경, 여성으로서 느끼는 여성 혐오 등에 대한 진지한 논의들이 이어졌다. 특히 장애여성 당사자가 장애여성과 출산에 대한 논의를 할 때는 그 이야기의 내용 자체가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그 고통이라던가 차별이 생생히 느껴져 더 절절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분노를 느끼고 공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에 역시 이러한 논의는 필수적이었다.
발언 이후 이어진 행진은 보신각 일대를 돌면서 구호를 외치는 식으로 진행됐다. 분기점을 돌다가 참가자들이 서로의 밝은 모습을 보았을 때 나오던 에너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다시 청계광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유발언이 이어졌고, 디지털 성범죄와 몰카를 이야기하던 누군가의 눈물은 여러모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무리로는 이 문화제의 주제가와도 같은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각자의 흥을 표현하는 시간이 있었다. 같이 참가한 선배는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자신을 검열하고 진지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는데 여기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참 좋은 집회였다고 말했다. 이하동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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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활기찬 분위기는 서로가 서로를 마음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과 상처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분노를 '엄한 데' 푸는 것이 아닌 분노를 일으킨 대상을 비판하는 면에서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소수자들은 자신의 분노를 이야기하기 위해 더 많은 용기와 고찰이 필요하겠다는 자각에 씁쓸함이 다소 있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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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제를 다녀오고 나서 여성과 사회에 대해 나름의 결론은 내려보았다. 그 내용이란 것은 정말 별게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기에 굳이 써보려고 한다.
누구도 그 말에 대해 '여성의 발언이기에' 비난할 수 없다.
외부의 압력에 의한 자기검열 역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을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끌어내리거나 끌어올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누구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범죄의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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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페미답게 쭉쭉간다' 문화제에 대한 생각의 집합이었다. 이번 문화제는 여성들이 '다시 만난 세계'에서 살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으며, 사회에 만연한 혐오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공유하는 기회였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많아지길, 아니 곧 이런 자리도 필요 없어질 만큼 여성이 인간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오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