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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쌤 May 01. 2020

남편은 왜 파파라치가 제안한 $3,000을 거절했나

공부하는 남자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1>


나의 예상을 처절하게 빗나간 신혼여행에 대해서는 바로 앞에 적었다. 대체로 안 좋은 쪽으로 엇나갔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재미있는 순간도 있었는데, 바로 보그 같은 잡지에서나 보던 연예인을 실제로 만나는 경험이었다.

 

그들을 목격한 수영장

그날은 처음으로 하늘에 구름이 조금 낀 흐린 날이었다. 우리는 신의 물방울 열 권과 전화기를 챙겨 인피니티 풀로 나가서 한쪽 코너의 카바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영도 하고, 마가리타도 마시고, 낮잠도 잤다. 앞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리조트 가면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한 내 마음과는 달리 이 리조트는 궁극의 한적함을 추구했기에, 한적하다 못해 적막했기에, 우리 외엔 손님도 거의 없었다. 이미 우리의 여정도 중반을 넘어섰기에, 이젠 익숙했다.


몇 시간 후 사람들이, 그것도 젊은 커플과 어린아이가 왔더. 대략 만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금발머리 여자아이와 그 부모로 보였다. 그때는 우리가 부모가 되기 전이라, 저렇게 몸으로 놀아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감이 없었는데도 "참 열심히도 놀아준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물에 젖은 애들은 생각보다 무겁다) 아빠 손바닥 위에 아이를 세우고 물속으로 내동댕이 치기도 하고, 등에 업고 다니기도 하고, 물장구치며 놀기도 했다. 적막하던 공간에 아이 웃음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니 나도 기분이 덩달아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한쪽 구석에 있던 우리 카바나 근처까지 와서 놀던 아이 엄마가 시끄럽게 하고 물 튀겨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넸다. 아유, 미국 여자가 예의도 바르구먼, 흐뭇한 찰나 나는 그녀의 매력적인 보조개와 건치미소를 알아 보았다. 아무리 미국 연예인에게 문외한인 나지만. 그녀가 영화배우 제니퍼 가너라는 정도는 파악 가능했다.

출처) https://vimeo.com/collidervideo

그렇다면 그녀 옆의 저 남자는 혹시? 자세히 보니 그가 맞았다. 벤 에플랙. 보통 굿윌헌팅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나는 Dogma라는 영화를 의외로 많이 재미있게 봤다. (부끄럽지만 아마겟돈도 보고 울었다. 생각해 보니 브루스 때문이었구만.) 특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미없는 왕범생이처럼 생긴 맷 데이먼 옆에 있으면 껄렁한 매력이 한층 배가되는 것 같았다.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medilldc/5509761299/

이 부부가 브루스 윌리스와의 인연으로 이 리조트에서 결혼했었다는 기사는 읽었는데,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딱히 연예인이나 영화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했지만, 지루해지던 신혼여행이 갑자기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알아본 남편과 나는 소곤소곤 거리다가 이 순간을 기억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아이폰 1세대로 사진을 찍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그 뒤로 많은 백업과 전화기 변경 중에 없어지고 (어딘가는 있을 텐데), 한 장만 남았다. 벤 애플렉과 딸 바이올렛이 정면으로 찍힌 사진. 신혼여행 이후 두고두고 이야기할 거리가 증거와 함께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내가 사진을 찍고 있는 걸 알았을까?

다다음날 집으로 돌아와서 사진들을 보다가, 갑자기 이런 사진들은 금액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을지 궁금해졌다. 구글로 파파라치를 검색했더니 몇 개 연락처가 뜨기에 두 군데에 별 기대 없이 이메일을 보냈다. 대략 누구를, 언제, 어디에서 찍었는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놀랍게도 두 군데 모두에서 빛의 속도로 답장이 왔다. 더 놀라운 것은, 무려 $3,000이나 제시했다는 것이다. 지금 제니퍼 가너의 친정 식구들과 해당 리조트로 여행을 간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LA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돌아오기 전에 파는 게 좋다고 재촉하며. 나중에 알았지만 이때 제니퍼 가너가 둘째 임신을 했다 아니다 루머가 돌 때라 더 비싸데 쳤나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당시 남편이 박사과정에서 받는 연봉이 $30,000이었으니 이는 한 달 월급을 상회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나름대로의 재미는 있었지만 돈값은 하지 못했던 신혼여행에 대한 보상을 내가 이렇게 받나 싶었다.


서프라이즈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이 갑자기 태클을 걸고 나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조용히 사진들을 팔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첫 번째로 법적 책임을 질지도 모른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날 그 수영장에 우리와 자기들밖에 없었으니 프라이버시에 대한 침해로 소송을 걸려고 한다면 우리를 특정할 수 있을 거다, 라는 이야기였다. 그 사람들이 여행 중에 리조트 수영장에 단 한 번만 갔을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그 이야기를 듣고 관련 법을 찾아봤다. 범죄현장이나, 국가안보를 해치거나, 혹은 공중화장실에서나 상대방 모르게 치마 속을 찍는 것 같은 행위가 아니라면 미국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었다. 만일 자기가 자기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대해서 소송을 걸 수 있는 사회라면 다음과 같은 광경이 가능할 리가 없다. 영화 속 장면이긴 하지만 실제 연예인들이 많이 출몰하는 캘리포니아 핫스폿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파파라치들이 상주하며 과격하게 촬영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저 둘은 그 이후로 아이 둘을 더 낳고도 안타깝게도 2015년에 이혼했지만, 엄마와 아이들은 일요일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어서 아예 파파라치들이 예배 시간쯤에는 그 앞에 진을 치는 모양이다.)

영화 노팅힐에서 데려온 한 장면. 실제는 이보다 더하다.

남편은 아랑곳 않고 두 번째 이유를 댔다. 법적으로 나에게 그럴 자유가 있더라도, 남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그 사진을 찍어 그걸 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싶지 않다는 논리였다. 어머 이건 또 무슨 공자님 같은 말씀이신가 (나랑 싸울 땐 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갑자기 나는 혼자만 양심에 털 난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딱히 뭐라할 수가 없었다. 본인 가치관이 그렇다는데 3천 불을 위해서 그걸 포기하라고 종용할 수도 없고. 결국 파파라치들의 거듭된 성화에도 불구하고, $3,000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공부하는 사람과 산다는 게 이렇다. 이후에도 비슷하게 가치관을 위해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는 남편을 지켜봐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 돈 문제만 그런 게 아니다. 어떨 때는 지상계의 욕망에 충실하다 못해 넘치다가, 어느 날은 뜬금없이 천상계로 혼자 올라가 사람을 당황시킨다. 그래도 학자라는 정체성이 그를 지켜주는 핵심임을 알기에 잔소리하지 않는다. 뉴스를 보면 개인적인 사리사욕과 입신양명을 위해 제자를 이용하고, 인격적인 모욕을 주고, 공금을 횡령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만나본 많은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이 높다 보니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돈 개념이 없어 고생하는 일도 많다. 돈의 액수보다 자신이 귀히 여기는 가치를 지키고 싶어 하고, 그러지 못할 때에 집안 쌀독이 비는 것보다 더 서럽게 여긴다. 그러다보니 집안 쌀독을 채우는 것은, 남편이 어디 가서 실수로 수표에 0 하나 더 붙인 건 아닌지 체크하는 것은 마누라 몫이다. 주변에 박사 남편을 둔 언니들에게 "박사 남편이랑 결혼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에게 뭐라고 조언할래?"라고 물었더니, 빛의 속도로 "결혼하지 마", "듣기만 해도 짜증난다”, “모든 도움이 단절된 커뮤니티에서 싱글맘처럼 애를 키우고 싶다면...”, 심지어 "찐 싫어"라는 반응들이 돌아왔다. 공부하는 남자, 별로라고? 안심마라, 나도 원래 범생이 싫어했다(맷 데이먼보다 벤 애플렉). 이 길을 가본 마누라들만 공유하는 뭔가가 분명 있다. 공부하는 남자와 결혼을 고려하고 있는 여자들이여, 논문으로 약속을 받아두라. 주석과 인용을 최대한 많이 달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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