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이름을 캐런이라고 지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미국에도 '김여사'가 있다. 다만 한국에서 '김여사'는 운전을 잘 못하는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놀리는 표현인데 비해, 미국에서는 비슷하긴 해도 조금 쓰임새가 다르다. 그리고 하나도 안 귀엽다. 오늘 뉴욕타임즈, CNN 등 미국 뉴스 매체들은 미국판 김여사의 만행과 그에 대해 분노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크게 보도했다.
미국에서는 캐런이라고 부른다.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기쎈 백인여성을 지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더 줄이자면 '갑질하는 백인녀' 정도? 가게 같은 데서 눈 깔고 논리적인 척 하면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다가 안 들어주면 무조건 매니저 부르라는 그런 사람. 마음대로 안되면 막말하고 욕하고 물건 부시다가, 경찰 출동하면 약한 척 하는 사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짤 (미국에서는 meme이라고 한다)에서 Karen과 가장 부합한다는 이미지가 바로 이거다.
난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안 해서 다행히 Karen을 만난 적은 없지만,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캐런들 때문에 마음에 시퍼런 피멍이 들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나마 동양인들은 대체로 일이라도 잘하니 우습게 보질 못하는데, 흑인들은 억울한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백인 동네를 지나가기만 해도 '수상한 사람이 있다'고 신고하거나 공원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고 있는 흑인들을 보고 경찰에 '범죄현장이 있다'고 전화하는 일이 많단다. 영화 아니냐고? 물론 Get Out이라는 영화에서 여자친구가 마지막에 경찰에게 피해자 코스프레 하던 장면도 있다. 그런데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생생한 현실 영상이 오늘 트위터에 올라왔다.
명문 시카고 MBA를 졸업하고 뉴욕의 투자 회사에서 잘 나가던 그녀는 오늘부로 센트럴파크 캐런 (Central Park Karen)이 되었다. 더불어 전세계에 얼굴이 팔린 빌런이 되었으며, 지금 엄청난 살해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대체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뉴욕의 랜드마크인 센트럴 파크에는 램블(the Ramble)이라고 알려진 조용한 숲이 있다. 특히 다양한 새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해 새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야생조류를 보호하기 위해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는 반드시 개 목줄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날 우리의 주인공도 개를 데리고 나왔는데, 목줄을 하지 않았기에 새를 구경하러 나온 흑인남성이 그녀에게 정중하게 개의 목줄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설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위협을 느꼈는지 영상을 찍기 시작했고 그녀는 광분했다. 손가락질을 하며 남자에게 다가오더니 되려 '흑인 남자가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비둘기나 구경하러 나온 예의바른 초로의 흑인 할배인 줄 알았던 이 남자, 하버드 대학 나온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란다. 심지어 마블 코믹스의 에디터였다고. 게다가 New York 야생조류협회 (Audubon Society of New York)의 이사회 멤버란다 (보통 이런 협회에서 보드멤버가 된다는 건, 기부도 많이 했고 발도 넓고 힘도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녀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며 무섭게 다가오자, 그는 어서 신고하시라고, 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고, 가까이 오지만 말아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그녀는 경찰에 전화해서 진짜 "흑인이 있어요. 저는 센트럴파크에 있어요. 저 남자와 나와 내 개를 위협하고 있어요"라고 하더니, 할리우드 액션 뺨치는 연기력으로 비명까지 지르며 흑인 남자에게 위협을 받고 있으니 경찰을 당장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이 모든 장면은 그가 찍은 영상에 찍혔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그녀가 다니던 회사인 프랭클린 템플턴 인베스트먼트의 웹사이트는 분노한 시민들로 인해 먹통이 되었고, 회사는 발빠르게 성명을 내 여자를 해고했으며, 키우던 개는 입양보냈던 기관에 도로 보내야 했다 (영상을 보면 목이 졸려 켁켁대는 개가 안쓰럽다). 뉴욕 인권위원회에서는 수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CNN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저 '무서웠을 뿐'이라며 그 남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본인의 신고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정말 몰랐을까? 작년에 자기 아파트 층수를 착각해서 다른 층으로 들어간 여자경찰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집주인 흑인 남자(회계사)를 총으로 쏴 죽이고도 단 10년형만을 선고받아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검찰은 28년형을 구형했다). 올해 2월에는 조깅하던 흑인남자가 '수상하다'며 차를 몰고 쫓아가 총으로 쏴 죽인 백인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단, 이틀 전에 미네소타에서는 비무장 상태이던 흑인 남자를 과잉제압 (경찰의 무릎으로 남자의 목을 바닥에 찍어누른 상태)에서 질식해 사망하게 만든 사건도 있었다. 이런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미국에서, 41살이나 먹은 그녀는 자신의 신고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자신은 결코 인종차별 주의자가 아니며, 이 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한탄하고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 영상이 없었다면, 그는 무사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영어학원에서 영어 이름 지어 오라고 했을 때 캐런이라고 지은 사람이 있다면 다른 이름을 고려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아, 어차피 동양인은 캐런이 될 수 없으니 괜찮으려나.
추신. 위에서 언급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흑인이 사망한 사건은 미국 전역에 걸친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인권과 평등을 외치며 시작한 시위는 무정부주의적 폭력 사태로 변질되었다. 루이비통, 구찌, 애플 매장들은 약탈의 타겟이 되었고, 경찰청과 정부 기관들이 불탔다. 인종차별을 철폐하고자 시작된 시민들의 행진을 왜곡시키는 것은 경찰인가, 흑인들인가, 아니면 모종의 배후 세력인가? 궁금하다면 다음 글로: “나쁜놈들 전성시대 - 미국이 불타고 있다” https://brunch.co.kr/@mbaparkssam/26
영상이 궁금하신 분들이 있다면:
https://twitter.com/melodyMcooper/status/1264965252866641920?s=20
CNN 뉴스
https://www.cnn.com/2020/05/26/us/central-park-video-dog-video-african-american-trnd/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