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P A, ENFP B의 이야기
무릇 어른들까지도 웃고 울게 만들었던 영화 <인사이드 아웃>.
지금까지의 감상은 어떠셨나요?
이번 주는 같은 MBTI 두 분의 감상을 공유하며, <인사이드 아웃> 1편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여러분이 평소에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가요? 마주하기 싫은 감정이 들 땐 어떻게 하나요?
필요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MBTI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은 무엇일까요?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기억 섬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상상해보며,
두 ENFP의 글을 만나보세요.
슬픔의 색으로도 마침내 행복을 그릴 수 있어요
'인간'을 담은 인사이드 아웃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쌓이고 쌓여 출력된 '일부'일 때가 많다. 가령 '다이어트'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종종 보기 좋게 만들어진 누군가의 외형에 초점을 두곤 한다. 사실 그 외형은 그 누군가가 열심히 운동한 결과값이고, 그걸 만들기 위해 노력한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도 좋아한다. 보이지 않지만 복잡하게 돌아가는 인간의 머릿속을 귀여우면서도 흥미롭게 담아냈다. 그리고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성장통, 세상의 이치를 깔끔하게 잘 보여줬다. 그럼 내가 <인사이드 아웃>에서 특히 좋았던 점에 대해 말해보겠다.
시각화의 놀라움
이 영화는 주인공 '라일리'의 머릿속 이야기다. 눈에 보이지 않고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걸 시각화했다. 라일리의 감정들은 캐릭터화되었고, 라일리가 경험했던 기억들은 잊혀지기도 하고, 핵심 기억이 되기도 한다. 이런 머릿속 세계관이 비주얼로 펼쳐지니, 그동안 막연했던 추상적인 개념들이 이해하기 쉬워졌다.
라일리가 새로운 곳에 이사 와서 적응하기 힘들 때,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비주얼로 보여지니, 왜 라일리가 저런 행동을 하고 왜 힘들어하는지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새삼 시각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슬픔이 있어야 기쁨도 있다
기쁨이가 엄청 소중하게 여기는 기억 구슬이 있다. 미네소타 하키 경기에서 득점한 행복한 순간이다. 그런데 이 기억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라일리가 과거에 경기에서 실수를 하고 가족들에게 위로를 받은 순간이 있었다. 슬픔과 기쁨은 연결되는 것이다.
기쁨은 슬픔이 있기에 느낄 수 있다. 마냥 기쁘기만 하면, 그 감정은 기쁜 것이라고 인식하기 어렵다. 라일리가 하키 경기에서 득점에 실패했을 때 느꼈던 좌절감이나 슬픔은 시간이 지나 라일리가 더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만든 다리 역할을 했다.
그래도 슬픈 건 싫다. 하지만 그 뒤에 있을 행복을 더 잘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하면 슬픔에 대한 무게감이 한결 더 가벼워진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사람들은 종종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 짓곤 한다. 이 영화에서는 '기쁨'은 좋은 것, '슬픔'은 나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영화에서도 기쁨이는 라일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가서는 라일리의 성장을 위해서는 즐겁기만 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좋은 게 꼭 다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꼭 다 나쁜 건 아니다.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듯, 지금 힘듦을 겪고 있다면, 그 힘듦은 분명 언젠가 좋은 자양분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사실 개봉 당시 나는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봤다. 당시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보니, 너무 잘 만든 영화다.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동안 나도 깨달은 게 있나 보다. <인사이드 아웃 2>도 영화관에서 보고 펑펑 울었는데, 3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
인사이드 아웃을 처음 본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저 '감정' 이라고만 생각했던 기쁨, 슬픔, 화남, 소심, 까칠함 등을 의인화하여 내 머릿속을 조정하는 ‘감정이’ 들이라니, 아주 신선했다. 그리고 이걸 어린 나이에 볼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항상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복잡한 감정들을 불편해하지 않고 나를 위해 일해주는 감정이들이 있다는 위안을 받았다면 내 어린 시절은 좀 더 편안하지 않았을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떤 인간인가 에 대한 탐구를 즐기는 편이었다. 종종 애어른이라는 말을 듣는 겉으로 보기엔 철든 아이였지만, 그것은 철든 아이를 연기하는 보통의 아이였고, 그 연기를 하기 위해 지옥인 마음을 숨기고 살았다. 그래서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지 못해서 흔히 말하는 철없는 어른으로 자라 지금은 어른이로 살고 있다. 애어른에서 어른이가 되어버린 모순이다.
하지만 애어른일 때의 나와 어른이인 나 중에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현재의 어른이 인 나. 애어른일 때에 나는 나를 마주하지 못했다. 슬픔이가 메인보드를 잡아도 기쁨이가 움직이는 척했고, 버럭이여도 무던한 척 가면을 썼다. 그래서 내 속은 조금 곪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기쁨이일 땐 정말 기쁘고, 슬플 땐 슬프고, 화날 땐 화를 아주 잘 내는 어른이가 되었다. 감정조절을 못한다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꽤 다른 일이다. 어릴 적 나는 어떤 감정이 들어도 그것을 감추고 있다 나중에는 터지는 둥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해소했다. 그렇게 어른이 된 나는 모든 관계에서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 몸과 마음을 갈아내듯 무리하여 인간관계를 유지하려 억지를 부렸고, 그 후유증은 오롯이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감정의 곰팡이들을 가장 가까운 소중한 사람들에게 퍼뜨리며 살았다. 겉으로 가깝지 않은 관계에 최선을 다하느라 가까운 이들에게 소홀했던 것이다.
나의 감정을 바로 마주하게 된 나는 이제 모든 섬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이 섬을 작동해야 하는데 옆 섬도 신경 쓰느라 삐걱삐걱 느리게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일이던 사람이던 최선을 다 해보고 그래도 되지 않는 것에 무리하게 집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오래도록 믿어주고 기다려준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마음의 단단함이 더 해졌다. 내 감정에 마주하고, 내 자신에게 솔직해진 나는 이제 아주 편안하다. 각 섬들이 조용하지만 꽤 순탄히 돌아가고 있다. 물론 그런 힘든 과정이 없이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후회없는 것은 없기에. 어릴 때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이였다 하고 내 자신을 위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