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엘레나 페란테 지음, 한길사 펴냄(2017)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엘레나 페란테 지음, 한길사 펴냄(2017)
나폴리 4부작 제목을 차례로 써 본다.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제목을 쓰기만 해도 읽었던 이야기가 떠오르는 걸 보면 인상깊게 각인된 책이 분명하다. 4부작을 읽고나자 이탈리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장엄한 서사 한 편, 대하드라마를 본 듯 하다.
릴라와 레누의 유년기, 사춘기 이야기를 담은 1권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총명하고 독특한 릴라, 인정받고자 부단히 애썼던 레누를 만났고 그 둘은 서로에게 눈부신 친구였다. 청년기 이야기를 담은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서 릴라와 레누는 완전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며 새로운 이름에 걸맞는 인생을 살게 된다. 3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 어쨌든 나폴리에 남아있으려는 릴라와 그곳을 악착같이 떠나려는 레누의 중년을 만나며 그녀들을 둘러싼 주변에 눈을 돌리게 된다. 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에서는 릴라와 레누가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를 때까지 순탄하고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치열하고도 투쟁적인 삶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나폴리 마지막 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앞의 세 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읽었다. 평생 한 남자 니노를 사랑했던 레누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어디쯤에서 어떻게 판가름날지 궁금해서라도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다. 레누는 지독하게 중독된 사랑에 대해 말한다.
“나는 니노의 육체와 목소리와 지성없이 살 수 없었다. 인정하기는 끔찍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원했다...교양 있고 자유로운 여인은 꽃잎을 잃고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게서 떨어져 나갔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은 유부남의 정부인 여인에게서, 유부남의 정부인 여인은 광분한 창녀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향으로 뿔뿔이 흩날릴 참이었다.”(128쪽)
결국 니노는 경멸의 상징인 자신의 아버지와 빼닮아 있었고 레누 스스로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평생 사랑한 남자의 아이를 하나 얻은 것으로 레누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서른 여섯 나이에 레누와 똑같이 임신한 릴라의 삶은 어떠한가. 평생 자신과 나폴리를 위협하는 악과 같은 존재인 솔라라 형제와 싸웠다. 겉으로 영리하고 강인해 보이는 릴라였지만 그녀는 늘 불안해하며 살았다.
“내 유일한 문제는 항상 불안한 마음이었어. 나는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해. 항상 무엇인가를 하거나 다시 시작하지. 진실을 감추기도 하고 밝혀내기도 하고 뭐든 튼튼하게 만들었다가 갑자기 파괴하거나 부서뜨려 버리지.”(241쪽)
평탄하고 순조로운 삶 대신 대립하고 투쟁하며 살아온 릴라의 삶 그 이면에 불안이 자리잡고 있었다니. 딸 티나를 낳고 잠시 평범한 행복감을 누리나 싶더니 그 딸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그녀는 깊은 수렁속에 빠져든다.
나폴리 4부작은 ‘나폴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나폴리와 그를 둘러싼 정치, 역사, 문화는 이 시대 세계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나폴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치던 레누는 나폴리 때문에 유명한 작가가 된다. 그녀가 쓴 소설은 모두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나폴리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레누에게 나폴리는 떠나고 싶었으나 한 치도 떠나서 살 수 없었던 곳이었다. 나폴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살았던 릴라는 나폴리를 지켜내려고 부단히 애쓰며 살았다. 그녀가 지닌 이념과 신념은 나폴리를 나폴리답지 않게 하는 것에 저항하는 그녀만의 고유한 것이었다. 딸을 잃은 후에 나폴리에 대해 부단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자세만 봐도 그렇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날 홀연히 증발해 버린다. 나폴리에 대한 사랑이 다 해서였을까. 더 이상 사랑할 것이 없어서였을까.
처음엔 먼 나라 먼 곳의 문학이 낯설어서 매력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우리들의 이야기 같아 친숙해졌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세 계절을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과 함께 했다. 덕분에 어떤 계절도 허투로 보낸 것 같지 않다. 다가올 봄까지도 꽉 찬 느낌으로 보낼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