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출간했지만, 싸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싸인을 할 수 있는 아주 예쁜 노란색 면지도 책에 들어갔지만, 그곳에 내 글씨를 적은 일은 없다. 심지어 부모님께 책을 드릴 때도 그랬다. 담당 편집자님 말로는 노란색 면지의 색명은 '해바라기'라고 한다. 책에 해바라기 이야기가 나온다.
책을 내니, 주변에서 하는 말 중 하나가 "싸인해주세요."다. 실제 싸인을 원한다기보다 대부분은 그냥 나 기분 좋으라고 해주는 말일 것이고, 아주 몇몇은 진짜 싸인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을 받아 든 아버지는 그냥 이름 쓰면 그게 싸인이지... 하셨는데 나는 좀 그렇다. 엄청난 악필이라 싸인을 받아 든 상대가 "아, 이 글씨를 보니 도저히 책을 볼 생각이 나지 않는군." 할까 봐 그게 좀 두렵다. 내가 그 정도로 악필이다.
연애시절 그래서 연애편지를 쓴 일도 드물다. 아주 가끔 수기로 편지를 쓴 일이 있지만, 그때도 내 진심에 비하면 내 글씨는 왜 이렇게 엉망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엉망인 글씨를 보고 내 마음이 오히려 전달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방위산업체 근무할 때 자재 부서에서 일을 했다. 세상 살면서 할 수 있던 싸인은 그때 다한 거 같다. 자재를 받고 내어줄 때 싸인을 했다. 자재의 품목과 수량 등을 확인하고 싸인을 하는 것이다. 그때는 그야말로 이름을 1초 만에 후다닥 쓰고 말았다.
싸인 연습을 해야 할까. 작년 일산의 <버티고> 서점에 갔을 때 여러 작가들의 싸인이 붙어있었다.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싸인을 보면서 글씨 참 예쁘다, 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필체는 둥글둥글했고, 누군가의 필체는 날카로웠다. 각자 자기만의 색깔이 담긴 듯했다.
한글은 엉망이고 한자로 싸인을 할까 싶기도 하다. 한자는 한글에 비하면 글씨체가 그나마 봐줄만하다. 내가 살면서 칭찬을 받은 일이 드문데, 고교 시절 한문 선생님은 내가 쓴 글씨를 보고서 "너는 한자를 좀 잘 쓰네." 하기도 했다.
서점이든, 맛집 식당이든 사람들이 써놓은 싸인을 유심히 본다. 정자로 쓰든 휘갈겨 쓰든 각자만의 싸인이 있다는 것이 부럽다.
나도 분명 내 글을 좋아해 주는 독자가 나타나겠지. 그 독자가 화사하고 예쁜 노란 빛깔의 면지를 펼쳐 보이며, "싸인 해주세요." 한다면, 나는 엉거주춤하면서 "저 죄송한데, 제가 싸인이 없어요." 하겠지. 그러면 독자는 날보고 "뭐야, 재수 없어." 할 수도 있겠지. 사실은 그게 아니라, 진짜 싸인이 없는 건데.
책을 냈다고 형이 볼펜을 하나 사주었다. 싸인할 일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재수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또 싫다. 아무래도 싸인 연습을 좀 해야 될까.
내 이름을 적어내는 일이 이다지도 어색하고 어렵다.
책은 알라딘 기준, 국내 소설 장르 베스트 73위에 올랐다. 위로는 김세희 작가의 <항구의 사랑>이, 그 아래로는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 있다. 참 꿈같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