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표현은 너무 어렵다.
지난 설 연휴에 영화 <히트맨>을 보는데 권상우가 자책하며 병신이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돈도 못 벌고 가족들도 못 챙겨 스스로를 탓하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병신이라는 단어를 쓴 게 기억에 남는 이유는 한동안 이 단어에 대해 고민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준비하면서 출판 관련 카페에 가입했다. 대부분의 회원이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지만 나처럼 글 쓰는 사람도 더러 있고 그렇다. 당최 책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서 가입한 카페다.
현직 소설가이자 출판사 대표인 K도 이곳 회원이다. 어느 날은 누가 게시판에 질문을 올렸다. "책에 병신이라는 단어를 써도 괜찮나요?"라는 질문이었다. K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K의 답변을 보고서는, 그런가? 병신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 되는 건가 싶었다. 대혐오의 시대에 살면서 사람들은 단어에 민감하다. '병신'이라는 단어에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뜻을 품고 있으니 쓰지 말자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어느 날은 알고 지내는 한 출판 편집자의 SNS에서 업무 중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스스로를 병신이라고 올린 피드를 보았다. 출판인이라도 단어를 대하는 방식은 이렇게 다르다.
이쯤 되니까 병신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세상에 쓰지 못할 단어는 없다고 믿는 편이다. 사어가 아닌 이상은 모두가 세상에 쓰이는 말들이니까. 하루에도 뜻을 알 수 없는 신조어들이 무수히 생기는 시대에 사람들은 단어 선택에 제약을 두기 시작한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서문을 보면 '결정장애'라는 단어를 쓴 것을 후회하는 글이 나온다.
결정장애라는 단어에 장애인을 비하하는 뜻이 담겼다는 의미다. 그런데 '장애'에는 꼭 사람을 가리키는 뜻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꼭 신체가 아니더라도 뭐가 좀 부족하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장애라는 단어를 쓰니까.
예) 통신 장애
나는 평소 '결정장애' 같은 표현을 쓰지는 않지만 이 단어가 과연 장애인을, 그러니까 사람을 비하하는 단어인지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어도 단숨에 와 닿지 않았다. 장애인들이 '결정장애'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어떤 기분일지도 각각 다를 텐데.
설경구가 설현을 가리켜 '백치미'가 있다고 했다가 욕을 먹은 적이 있다. '백치미'에 여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사회적 관습이 남아 있어서 혐오표현이란 얘기다. 좀 뜨악했다. 백치미 소리를 듣는 남자들도 적잖기 때문에. 혐오표현이 젠더 문제로 넘어가면 더 복잡해진다.
다시 '병신'이라는 단어로 넘어와서 나는 가끔 노래 가사 보면서 '병신미' 넘치는 가사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화자의 어리숙한 감정 표현을 담은 좋은 가사를 만날 때 쓰는 표현이다. 공옥진은 양반을 까며 '병신춤'을 췄다. 물론 이 명칭도 논란이 있었고, 공옥진은 '곱사춤'으로 불리길 원했단다. 피타입의 그 유명한 '븅신이 븅신인 걸 알면 븅신이 아니고 븅신은 븅신이 븅신인 걸 몰라야 븅신' 하는 가사는 아예 '븅신랩'으로 불린다.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는 나쁜 제목인가. 생각이 많아진다.
좋은 말 쓰기 운동이나 인권위에서 권하는 단어는 이해가 가면서도 현실에서는 참 어렵다. 나도 모르게 쓰는 혐오표현을 알면 알수록 현실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글을 쓰면서 단어에 대한 고민은 계속해야겠지만 '병신'이라는 단어가 문학이나 예술, 은유의 범주 안에서 쓰일 때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나는 조금은 답답할 것 같다.
사진은 지난여름 서울미술관에서 찍은 운보 김기창의 <미인도>다. 작가 소개에 어린 시절 청각장애를 극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애를 극복하다"는 말도 지양해야 하는 표현이란다.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극복의 뜻은 고생 따위를 이겨내는 것, 이다. 그동안 우리가 쉽게들 써온 표현.
물론 장애인에게 동의 없이 도움을 주는 행위 혹은 "희망을 갖고 사세요. 힘내세요." 하는 말이 그릇된 말인 줄은 알겠지만, 장애를 극복하다는 쉽게 써오던 표현들이 잘못이라고 하니 참 어렵다.
2018년도 서울시는 행정 순화 용어 중 '정상인'을 '비장애인'으로 바꾸기도 했다. 혐오표현이라고 못 박는 단어들이 늘어날수록 사어들도 늘어나겠지. 언젠가는 '정상인'이라는 단어도 사라질지 모르겠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의 대척점에 대해 고민한다.
혐오표현 참 어렵다. 차별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이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