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저를 구독하신다고요??
지독한 악필이다.
내가 쓴 글 내가 못 알아먹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상대방 기분 상할까 봐 연애편지도 자주 못썼다.
나 같은 사람은 타이핑이 참 고맙다.
타이핑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라 좋다.
스무 살 PC통신 유머글 동호회에서 글을 썼다.
그때는 [엽기적인 그녀] 같은 글이 인기가 있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내 글쓰기의 7할은 그 시절 영향을 받았다.
나도 재미있고 감동적인 글을 써야지.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지.
20대 중반부터는 도장 격파하듯 돌아다니며 글을 썼다.
키보드가 내겐 무사의 검과 같았다.
디시인사이드 음반 갤러리, 즐뮤직, 힙합 플레이야 같은
음악사이트에 온갖 음악 관련 글을 썼다.
시답잖은 잡담부터 나름 심혈을 기울여 쓴 글까지.
네임드가 되기도 하고 악플 세례를 받기도 했다.
게시판에서 일반 회원으로 글을 쓰다가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마침 흑인음악웹진 한 곳에서 필자 모집 공고가 떴고 지원했다.
붙었다. 그렇게 몇 년을 글을 썼다.
웹진에서 글 쓰는 일은 즐거웠다. 조회수도 적게는 수천 건에서 수 만이 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흑인음악(알앤비, 힙합)이라는 소재의 제약과 시간이 지나면 소모되는 글이 아쉬웠다.
흑인음악을 다루지 않은 글을 쓸 때는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 글을 썼다.
어느 날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음악동호회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다.
평소 내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신 분이 한마디 던지셨다.
"경화 씨. 글 재미있는데 책 한 번 써보는 거 어때?"
책 한 번 써보라는 그 말에 심장이 나대기 시작했다.
립서비스 일지도 모를 그 권유에 나도 모르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음악 에세이를 써보고 싶어요. 꿈입니다."
그저 생각으로만 그치던 꿈을 행동으로 움직이게 해 준 고마운 권유였다.
늦은 가을부터 겨울까지.
그렇게 인터넷에 흩뿌려진 글과 새로 쓴 글들을 모았다.
책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 인터넷을 찾아봤다.
기획출판, 자비출판, 원고 투고 같은 출판 일련의 과정들을 알아갔다.
원고 투고 관련해서 브런치에 올라온 많은 글이 도움이 됐다.
림태주 시인의 원고 투고 팁과 다산북스 에디터의 글.
그중 가장 큰 도움이 된 글은 현직 작가의 출간 후기 글이었다.
투고 원고를 책으로 낸 후기였다.
'1%의 가능성, 원고 투고로 출간하기'라는 제목.
https://brunch.co.kr/@okbjy/117
군산에 거주하는 배지영 작가의 글이었다.
열 번도 넘게 봤다. 투고자의 떨림과 계약, 출간.
서점 매대에 책이 올라가는 그 모습까지 담긴 생생한 후기 글은
투고를 준비하던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주었다.
다음 날 바로 배지영 작가가 투고를 해서 나왔다는 책 [소년의 레시피]를 사봤다.
장바구니를 든 소년 일러스트가 들어간 깔끔한 민트색의 표지였다.
책은 두껍지 않았다. 며칠이면 완독 할 수 있는 책.
나는 그러질 못했다. 몇 페이지를 남겨두고 책을 덮었다.
글 쓰면서 노벨 문학상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소설가나 작가군의 글을 읽어도 필력이 부럽다는 생각을 안 하고 살았는데 배지영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질투심이 났다.
내가 그렇게 쓰고 싶었던 유머와 감동이 묻어 나오는 글이었다.
[소년의 레시피]는 작가의 고딩 아들이 학교 야자시간 대신 집에서 밥을 하는 내용이다.
작가의 관찰일기이기도 하고 소년과 작가의 성장일기이기도 했다.
일상 언어로 쓰인 글이다. 사전을 뒤져봐야 할 어려운 단어가 없었다.
유머와 감동에는 억지가 없었다. 술술 읽혔다.
엄마 대신 밥을 하는 큰아들 제규와 열 살 터울의 둘째 꽃차남, 작가와 그의 남편.
네 가족은 때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그 안에는 사랑이 피어나고 있었다.
생면부지임에도 정다운 이웃사촌의 이야기 같은 책이었다.
그래. 이 정도 글이어야 출판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구나.
나는 배지영 작가처럼 될 수 있을까?
투고할 출판사 리스트를 작성했다.
배지영 작가의 글을 책으로 내 준 출판사를 가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잘 될 거야' 하는 자신감과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했다.
원고에는 50 꼭지 정도의 글이 있었다.
처음에는 에세이를 전문으로 출판하는 곳을 골라 투고를 했다.
그다음에는 한 번이라도 에세이를 출판한 곳이 있으면 투고를 했다.
투고는 잘 안됐다.
배지영 작가처럼 글을 읽은 지 몇 분만에 답장이 오는 멋진 일은 없었다.
반려 메일이 쌓여가던 시기.
같이 하고 싶었던 한 출판사 편집자에게 원고의 피드백을 구했다.
원고를 재미있게 읽었고 감동과 웃음이 있었지만 개인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평이었다.
음악 에세이 시장이 넓지 않음도 얘기해주었다.
자신의 피드백이 원고 색을 흐릿하게 만들지 않을까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 조심스러움이 나는 고마웠다.
편집자는 도움이 되고 싶다며 브런치에 글을 올려볼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나는 브런치로 흘러 들어왔다.
평소 페이스북도 친구 공개로만 글을 쓰던 내가 브런치 같은 플랫폼을 견딜 수 있을까 싶었지만 해보고 싶었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투고했던 원고를 하나, 둘 풀었다.
며칠간 몇 개의 원고를 브런치에 풀고서는 배지영 작가가 쓴 '1% 가능성' 글을 라이킷 해두었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글이다.
다음날 늦은 밤 핸드폰에 알람이 떴다.
'배지영님이 내 브런치를 구독합니다.'
응? 배지영? 군산에서 [소년의 레시피]를 쓴 그 배지영 작가?
당시 내 구독자는 다섯 명. 왜죠? 뭐죠?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필력을 지닌 배지영 작가가 내 브런치를 구독한다니?
구독 버튼을 잘못 누른 게 아닐까 싶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다음날 배지영 작가의 브런치에 찾아가 댓글을 달았다.
작가님은 내가 쓴 글에 댓글을 달려다가 구독을 눌렀다고 했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글이 좋았다고 했다.
배지영 작가는 [소년의 레시피] 출간 전에 [우리, 독립 청춘]으로
카카오 브런치북 2회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분이 내 글이 좋았다고 했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의 조회수가 생각보다 많이 안 나오고
구독자도 늘지 않는 내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구독자다.
내가 부러워하던 필력을 지닌 특별한 구독자.
브런치에 글쓰기를 계속하려 한다.
배지영 작가님은 내 글에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셨다.
"경화님, 브런치에 글 계속 쓰세요. 책 출판 같은 좋은 일 생길 거예요."
출간 후기글에서 댓글까지.
내게는 무한한 가능성과 꿈을 불어주는 고마운 글이다.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우!유!빛!깔! 배!지!영!
여러분.
[소년의 레시피] 읽으세요.
두 번 읽으세요.
저는
음악 에세이를 씁니다.
소심하고요.
악플에는 상처받습니다.
그래도 쓰려고요.
누구라도 김춘수가 되어
저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저의 글을 읽어주세요.
누구라도 저의 글을 보고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꽃이 되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세요.
김춘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