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 Feb 23. 2018

전화카드 한 장


“네 부모님을 생각해, 그리고 나를 한 번 생각해”


롱 디(Long Distance)

장거리 전화를 뜻하지만 장거리 연애로 쓰이기도 한다. 살면서 내게도 한 번 있었다.


구로공단에서 방위산업체로 일할 때였다. 한참 힙합을 들을 때라 회사 어르신들의 눈초리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레게 파마를 하고 다녔다. 귀도 뚫었다. 외모가 아주 그냥 힙합이었다. 레게 파마를 하고 첫 출근을 한 날 부장님은 다 포기한 듯 “잘 어울리네” 했다.


경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S는 방학을 맞아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까만 긴 생머리였던 S도 어느 날 레게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수많은 공돌이, 공순이를 봐왔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공장 노동자 대부분은 40대 이상의 아주머니였다. 살다 보면 단순히 헤어스타일만으로도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구나 싶었다. 부장님은 한숨을 쉬었다.


S는 방학 기간에만 일을 하기로 한 거라 금방 잊힐 인연이었을 텐데 우리는 그러질 못했다. 호감을 느끼고 이메일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날 우리는 연인이 되기로 했다. 회사가 쉬는 날이면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손을 잡았다. 가끔 그 아이가 깍지 낀 손에 있는 힘을 꽉 주면 그게 참 좋았다. 작은 손이었다.


한 달여의 공장 생활을 마치고 경주로 그 아이를 떠나보내기 전에 얘기를 나누었다. 운동권 학생이었다. 몰랐던 일이었다. 학교로 돌아가 계속해서 운동을 한다면, 그런다면 자기는 수배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살면서 나와는 상관없을 것만 같은 얘기였다. 사실 들어도 무슨 얘기인지 몰랐다. 운동한다는 첫마디에 ‘헬스를 하나?’ 싶었지. 주사파란 일주일에 학교 네 번 가는 학생을 가리킨다던 쌍팔년도 썰렁한 대학가 유머가 장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네 부모님을 생각해. 그리고 나를 한 번 생각해. 그래도 네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야 했지만, 다행히 S가 수배되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서울과 경주에서 사랑을 키워 나갔다. 본격적인 장거리 연애로의 돌입. S는 내게 편지를 써서 보내주었고 먹을 것도 보내주었다. 학생 주제에. 돈도 없으면서. 경주에서만 나온다던 빵도 보내주었다.


지금이야 휴대폰의 무료통화가 흔한 시대지만 그때는 서울과 경주에서 통화하려면 전화비가 많이 나오는 시절이었다. 구로공단 공돌이의 월급은 뻔하다. 전화요금이 부담스러워 야근을 하는 날이면 회사 전화기를 통해 S에게 전화를 했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렇게 오래오래.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걸어 투정을 부렸다. 보고 싶다고. 내려올 순 없냐고. 술에 잔뜩 취해선.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몇 달이 넘도록 쉬는 날이 없었다. 주말이 없었다. 그때 단 하루만이라도 경주에 내려가는 버스를 탔더라면, 그럴 수만 있었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미안해. 너무 힘들어. 이건 아닌 거 같아”


어느 늦은  밤. S는 여는 때와 같이 술에 잔뜩 취해 내게 말했다. 장거리 연애라는 거. 생각보다 많이 힘든 거구나. 기다리는 사람도.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서로가 많이 힘든, 그런 거구나.


그렇게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키워나가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했다. 바쁜 일상 속에 서로를 챙겨주지 못했다. 서로를 채워주질 못했다.


S는 내게 자신이 즐겨 듣고 부르던 음악들을 선곡해 CD에 넣어 보내준 적이 있다. 천지인의 <청계천 8가> 같은 운동권 현장에서 불리던 곡이었다. 그 CD에는 꽃다지가 부른 <전화카드 한 장>도 있었다.


우리는 그저 전화로만, 그리고 편지로만 서로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살다 보면,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눠야 하는 순간이 있지. 우리에겐 그런 순간이 없었다. 함께한 순간이 너무 없었다. 전화로는 다 전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꽃다지 - <전화카드 한 장>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여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 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이전 06화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