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연휴 첫날 늦은 밤이었다. 안방에서 아내가 전기 콘센트를 꼽는 순간 '파팟' 소리가 나더니 온 집이 어두컴컴해졌다. 태어나서 정전을 처음 경험한 일곱 살 큰 애는 무섭다며 눈물을 터트리려 했다. 정전이 왜 됐을까.
합리적 의심을 해 볼 시간. 보올 형태의 가습기를 쓴다. 보올 안에 물을 가득 담아 사용하는데 14개월 된 둘째가 가습기를 건드렸을 거다. 전기 멀티 탭에 물이 조금 떨어졌을 테고 그걸 몰랐던 아내는 그대로 전기를 꽂았겠지. 그 순간 파팟. 정전.
아내에게 조심 좀 하라고 얘길 했더니 "나 몰라. 배 째" 스킬을 부렸다. 화가 났다. 마음이 넓지 못한 나는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군다. 핸드폰 손전등 버튼을 눌러 전기를 살려야 했다. 아내가 두꺼비집에 가보라고 했다. 이사하고 두꺼비집을 처음 열어봤다.
두꺼비집을 열다가 발을 헛디뎠다. 엄지발톱 일부가 깨져 날아갔다. 나이 먹어 가면 손톱 발톱도 힘이 약해진다. 방위산업체 다닐 때 기계 장비를 옮기다가 발톱이 빠진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이 살아나서 울고 싶었다. 또 화가 났다.
투혼을 발휘하며 두꺼비집을 열어보니 누전차단기가 떨어져 있었다. 스위치를 올리고 집은 환해졌다. 다행이다. 전기 콘센트를 보니 물이 흥건했다. 멀티 탭을 뒤집어서 물을 빼내는데 아내가 또 일을 시킨다.
"보일러 좀 봐줘. 안 켜져"
고등학교 때 수포자에 과학이 싫어 문돌이가 된 사람이다. 기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팩스의 원리가 신기해서 인터넷에 '팩스 원리'를 찾아본 사람이다. 그런 내게 보일러를 보라니. (지금도 수학에 싸인, 코사인, 탄젠트 같은 알파벳이 왜 나오는지 미스테리다. 숫자에 알파벳까지 있으니 단순히 수학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보일러 전원이 안 켜졌다. 눈에 보이는 버튼을 다 눌러봤는데도 안 된다. 나와 아내는 이불 뒤집어쓰고 자면 됐지만 어린아이들은 밤에 추위에 떨지도 모를 일. 보일러 AS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그 밤에 보일러 고장 나는 집이 많았는지 통화 연결도 한참이 걸렸다.
상담원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누전차단기가 떨어졌고 보일러 전원이 안 켜진다고. 어떻게 켜는지 알려 달라고 했다. 상담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라고 했다. 수긍했다. 그래 난 기계치니깐. 접수를 하면 다음날 오전이면 기사분이 오신다고 했다. 출장료는 만오천 원이지만 연휴 할증이 붙어 이만 원이라고 했다. 연휴인데 오셔서 보일러만 고쳐 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다음 날 약속대로 기사 분은 오전에 방문하셨다. 과연 상담원의 말대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사 분은 능숙하게 보일러 본체를 열어보시더니 뚝딱 고쳐 주셨다. 실온으로 설정돼있던 보일러를 온돌 설정으로 바꿔주시기도 했다. 온돌 온도를 몇으로 맞춰야 할지 몰라 다음날 바로 원래대로 돌려놓긴 했지만.
춥고 돈 나가고 발톱 나가고 아이들은 두려워하고 와이프에겐 화를 내고.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울만한 사유는 여러 가지다.
십센치(10cm)의 <그게 아니고>를 좋아한다. 반전이 있고 섹시한 가사다.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운다던 화자는 가사 마지막에 옛사랑이 보고 싶어 울었노라고 고백한다. 청자의 뒤통수를 때려주는 그 노랫말이 좋다.
나는 정말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울고 싶었다.
십센치(10cm) - <그게 아니고>
어두운 밤 골목길을 혼자 털레털레 오르다
지나가는 네 생각에 내가 눈물이 난 게 아니고
이부자리를 치우다 너의 양말 한 짝이 나와서
갈아 신던 그 모습이 내가 그리워져 운 게 아니고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울지
책상 서랍을 비우다 네가 먹던 감기약을 보곤
환절기마다 아프던 네가 걱정돼서 운 게 아니고
선물 받았던 목도리 말라빠진 어깨에 두르고
늦은 밤 내내 못 자고 술이나 마시며 운 게 아니고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울지
어두운 밤 골목길을 혼자 털레털레 오르다
지나가는 네 생각에 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