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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Mar 11. 2018

좋아하는 단어. 까치발.

<서신>


불란서 말은 그렇다대. 단어에 남성형이 있고 여성형이 있다고. 난 우리말도 제대로 못할 뿐 아니라 영알못에 불알못(불어를 잘 알지 못하는)이다. 불알못이라고 하니 어감이 영 그렇긴 한데 암튼 불알못이다.

 

고딩 때 제2외국어로 일어와 불어를 택할 수 있었는데 뭔가 더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불어를 택했다. 지금 기억나는 문장은 꼬망딸레부, 쥬뗌무 밖에 없다. 써보라고 하면 못 쓴다. 불알못이다.


불어를 배워서 좋았던 건 98년도 고딩시절 프랑스 월드컵 때였다. 프랑스 선수 티에리 앙리(Henry)가 활약할 때 일어반 애들을 바라보며 "니들은 저거 못 읽지? 헨리라고 읽지? 우리는 배운 애들이라 앙리라고 읽는다" 라며 낄낄낄 거렸다. 그거 하나 좋았다. 낄낄낄 거리고 웃을 수 있었으니 됐지 뭐.


단어에 남성형, 여성형이 있는 게 당최 뭔 소린가 복잡해 보여도 어떤 단어를 말했을 때 다른 무언가가 연상된다는 건 멋진 일인 거 같다.

 

우리말 단어 중에 '까치발'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발뒤꿈치를 든 발'이라고 나온다. 애들 키우면서 본다. 아이들은 돌쯤 돼서 2족 보행을 하기 시작한다. 2족 보행이 완전히 익혀지지 않을 때, 불완전할 때 아이들은 까치발을 든다. 더 멀리 있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그렇게 무언가를 잡으면 손을 헤쳐 어지럽히기도 하고 입에 넣기도 하고 그런다. 까치발 든 모습을 보면 그게 참 사랑스럽다.


당구장에서도 까치발은 흔하다. 배 나온 숏다리 아저씨들은 당구장에서 서글프지 않겠어? 당구대에 기대서 당구 큐대가 공에 닿지 않으면 영락없이 까치발을 든다. 안 그래도 배 나온 숏다리 아저씨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다. 까치발 든 모습을 보면 그게 참 안쓰럽다.


이렇게 까치발은 그 단어만 들어도 무언가 기대하고, 기다리고, 갈망하고, 원하고, 애틋한 분위기가 연상된다. 그래서 좋아한다. 단어가 예쁘잖아. 까.치.발. 뭔가 욕망 적으로 원한다기보다 애틋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 


총각 시절 키가 작은 아가씨와 연애를 한 적이 있다. 사람 많기로 유명한 명동 한복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까치발로 나를 기다렸단다. 키가 작으니 위를 올려다보면 사람들 머리만 이리저리 둥둥 떠 다녔단다. 그 수많은 머리통 중에 나 한 사람 찾겠다고 까치발을 들었단다. 살면서 까치발 들고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기분 좋으면서도 참 애틋했다.

 

박혜경이 부른 <서신>에 까치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원곡은 가와구치 쿄고의 <Sakura>다. 일본에서 박혜경이 이 곡을 듣고 너무 리메이크하고 싶어서 직접 원곡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박혜경의 리메이크 버전도 좋아하고 일본 원곡도 좋아한다. 리메이크를 허락해준 원곡자에게도 고맙다. 덕분에 맑고 고운 박혜경의 음성으로 '까치발'을 들을 수 있다.


박혜경 <서신> 中

달빛이 유난히도 고와 

내 님이 보낸 마음 아닐까 

까치발로 달빛 품에 안으니 

다정한 숨결이 들리네요 


박혜경의 1집 타이틀 곡은 <고백>이었고, 2집 타이틀 곡은 <하루>, 3집 타이틀 곡은 <레인>  (원래는 <Rain>), 4집 타이틀 곡은 <안녕>, 5집 타이틀 곡은 <서신>이다. 


눈치 챘겠지만 타이틀곡 제목이 모두 두 글자다. 그때는 박혜경에게 두 글자 페티시가 있는 줄 알았다. 없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 있을지도 모른다. <고백>, <하루>, <레인>, <안녕>, <서신> 모두 좋아하는 곡이다. 특히 <Rain>을 부를 때 박혜경의 감정선을 사랑한다. 


TV에 오랜만에 박혜경이 나왔단다. 방송은 못 봤지만 기사를 접했다. 소송에 휘말리고 성대에 혹이 생겨 가수가 아닌 플로리스트의 삶을 살았단다. 다시 박혜경의 목 상태가 좋아져 음악 활동을 한다면 좋겠다. 그녀의 많은 팬이 마음속에 까치발을 들고 기다리지 않을까? 총각 시절 누군가가 나를 위해 까치발을 든 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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