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에는 두 번 글을 보내봤다. 모두 단편 소설이었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경험 삼아서. 온라인으로 한글 파일을 던지는 출판사 투고와는 달리 신춘문예는 A4 종이에 출력하여 신문사로 보낸다는 점에서 어쩐지 조금 낭만스럽기도 했고. 신춘을 통한 등단이든 출판사 투고든 목표는 계속 글을 쓰고 책을 내는 거였으니까, 어느 쪽도 상관은 없었다.
신춘문예와 관련하여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어느 해 자주 가는 우편취급국에서 보았다. 일 때문에 등기 우편을 하나 부치려 기다리고 있었는데 칠십대로 보이는 노인이 누런 서류봉투를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 그 봉투에는 큰 빨간 글씨로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응모작'이라고 쓰여있었다.
늦가을쯤에서부터 겨울까지 접수를 받고 신년 첫날 발표를 하는 신춘문예의 특성상 그날도 분명 추운 날이었다. 노인은 빵모자를 쓰고 있었다. 대체 글이 뭐라고. 이제는 황혼에 접어들었을 저 노인을 이 추운 날 우편취급국으로 오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글 따위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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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공모전에는 네 번쯤 글을 보냈다. 모든 실망은 기대를 하면서 나오는 거라지만 처음으로 브런치 공모전에 글을 보냈을 때는 당선작 발표일 며칠 전까지도 기대를 했다. 그때 한참 소통하던 군산의 배지영 작가님에게 결과 발표일을 기다리고 있다 했더니, 작가님은 이미 수상작 결정이 났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의 말이 처음으로 비수처럼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그렇구나. 벌써 결정이 됐구나. 수상자들에겐 이렇게나 빨리 연락을 하는구나. 나는 이미 떨어진 채로 헛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거구나. 배지영 작가님은 당선자 중 하나가 자신의 지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허탈감과 함께 질투심이 샘솟기도 했다. 무엇보다 브런치 공모전 2회 대상 출신이었던 배지영 작가님의 말이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배지영 작가님의 말에 속은 쓰렸지만 덕분에 나는 이른 시간 현실 감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브런치 공모전과는 연이 없었지만 그 후 결국에는 출판사 투고로 책을 내게 되었다. 투고로 세 종의 책을 낸 2021년에는 그 어느 때보다 신나고 부담 없이 브런치 공모전에 글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브런치 공모전에 떨어지더라도 응모 원고로 책 작업을 하자는 출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런치 발표일 이후 당선작에 내 이름이 없으면 그 후에 계약을 하자는 출판사의 언약은 든든한 보험과도 같았다. 그렇게 나온 책이 마누스 출판사와 작업한 <작가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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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 이런저런 잡문을 올리다 보니 공모전에 또 응모할 수 있을 정도의 글이 모였다. 응모를 했고 발표가 났지만 내 이름은 없다. 올해는 전과 달리 50 작품이나 뽑으니까, 어쩌면 내 이름도 거기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조금은 했던 것 같다. 이제는 꼭 브런치 공모전이 아니더라도, 책을 낼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조금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아니, 좀 뽑히고 싶었던 것 같다.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브런치 공모전에 뽑힌다면 다른 원고의 첫 글을 시작하는 시간을 조금 미룰 수 있을 테니까.
올해 초 이전에 작업했던 한 편집자님을 만났다. 편집자님은 여섯 번째 책이 될 원고를 써보지 않겠느냐고, 글이 완성되면 자신과 함께 책으로 만들자고 말해주었다. 좋아요, 편집자님. 제가 언제 글을 시작할지는 모르니까, 우리 정식 계약은 하지 말고 구두로만 정해두어요. 제가 글을 쓰면 편집자님에게 보내드릴게요. 너무 늦지 않게 글을 쓸게요.
그렇게 쓰기로 시작한 글은 미루고 미루어져 몇 개의 계절이 지나가버렸다. 그 사이 다섯 번째 책작업을 하기도 했으니 편집자님은 한 번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브런치 공모전에 응모한 글이 수상을 했더라면 그 핑계로 첫 글을 조금 더 미룰 수 있을 텐데.
이제는 글을 쓰기만 하면 책으로 내주겠다는 편집자가 생겼지만, 어쩐지 시작이 망설여지는 글이 있다. 일단 스타트만 끊으면 쭉쭉 써 내려갈 것 같지만, 그 시작을 하기까지가 몹시 어렵고 힘든 글이 있다. 심연 깊이 들여다보고, 지나온 아픔을 되돌아봐야 하는 글이 있다. 울음을 참고서 써야 하는 글이 있다. 써야 하지만, 자꾸만 미루고 싶은 그런 글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써야지. 공모전에 떨어졌으니. 다섯 번째 책도 이제 곧 나올 테니까, 여섯 번째 책의 첫 글을 시작해야지. 이제는 미룰 수 있는 핑계도 없겠다. 텅 빈 한글 파일을 열고서 첫 글을 시작해야지. 조금은 시작하기 망설여지는 글이더라도.
때마침 하늘에선 눈도 나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