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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이 낮으면 좋겠다.

by 이경


혈압약을 타러 병원에 들렀다. 먼지도 미세 먼지가 유행인 만큼 병원에서도 예약을 미세하게 분 단위로 잡아준다. 예약 시간은 오후 4시 2분. 나는 약속했던 시간 10분 전에 길을 나서 빠른 걸음이나 뜀박질로 병원에 간다. 의사를 만나기 전 혈압을 재야 하는데 가슴이 두근거려 항상 혈압이 높게 나온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가 닥치고서야 행동에 옮기는 나의 습성을 의사 선생님은 알아챈 것일까. “병원 오면 긴장도 되고 평소보다 유독 혈압이 높게 나오는 환자분이 있어요. 환자분이 그런 경우인 거 같네요.” 라며 수동 혈압계를 재고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인정. 병원만 가면 왜 내 가슴은 사정없이 두근거리나.

이날도 병원에 도착하여 혈압을 쟀는데 평소보다 높게 나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충분히 휴식을 취했음에도 혈압이 높게 나와 버린 것이다. 의사는 넉 달 치의 약을 처방해주며 다음에는 이런저런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뭐, 혈액검사와 소변검사, 심전도, 엑스레이 등을 해보자는 얘기인데 별문제가 없다면 좋겠다.

의사를 만나기 전 사람들이 혈압을 재는 모습을 지켜본다. 40대로 보이는 키도 길고, 팔도 길고, 얼굴도 긴 한 아저씨가 혈압을 잰다. 위아래 모두 까만 츄리닝을 입은 그는 처음에는 오른팔을 넣었다가 수치가 맘에 안 들었는지 왼팔을 넣어 검사하고, 또다시 오른팔을 혈압계에 넣는다.


오메, 저 사람은 건강염려증이라도 있는 것인가. 병원 혈압계 전세라도 낸 것인가, 뭐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살다 보면 혈압 세 번 연속으로 잴 수도 있는 거지 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리를 뜨자 이번에는 70대로 보이는 할 할머니가 혈압을 쟀는데 혈압은 몹시 높았고 맥박은 무척이나 느렸다.

할머니는 혈압을 재고 수치를 보더니 몹시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깟 숫자가 뭐라고 저렇게 낙심을 하시나, 할 수 없을 정도로 혈압 수치가 높았기에 살면서 처음 본 할머니인데도 어쩐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오랜 세월 살아오시면서 실망스러웠던 일도 삶에 분명 많았을 텐데 그 표정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의술이 발달하고 약이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혈압약은 평생을 먹어야 한다. 가족력이다 보니 한참 커가는 아이들도 성인이 되고서는 언젠가는 혈압약을 먹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게 좀 미안하다. 돈도 시간도 혈압에 조금씩은 저당 잡혀 사는 인생을 물려주는 거 같아서. 매일 아침 알약을 삼켜야 하는 삶은 익숙하면서도 번거로운 일이다.

누구라도 정상이라고 부를 만한 숫자 사이의 혈압을 지니고 산다면 좋겠다. 고혈압이든, 저혈압이든. 우리 아이든, 이를 모를 70대의 낙심한 표정을 짓던 할머니든 그랬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넉 달 뒤에 이런저런 검사를 해야 하는 내 몸도 별 탈이 없다면 좋겠다. 안 그래도 화낼 일 많은 세상에 혈압이라도 좀 낮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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