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비와 음악 08화

무감한 사람의 무감으로 견디기

산울림 - 무감각

by 이경




글을 쓰고 책까지 내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책 하나를 읽었을 때의 감동보다 좋은 음악 하나를 들었을 때 얻는 감동이 훨씬 큰 사람이다. 가령 비슷한 주제의 글과 음악이라면, 황순원이 쓴 단편 <소나기>보다 밴드 부활의 <소나기>를 더 애정한달까. 부활의 <소나기>가 황순원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차치하고서.


게다가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느리고, 집중력도 많이 떨어지는 편이라 가끔은 단편 하나를 읽어내는 데에 몇 시간을 넘어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그에 반해 음악 한 곡은 대체로 길어봐야 5분 내외이고, 내가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시간과 함께 유유히 흘러가니, 역시 나 같은 게으름뱅이의 천성으로는 읽기보다는 듣기가 더 편하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듣고 나서 마치 단편소설을 읽어냈을 때의 느낌을 갖게 하는 음악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다. 이야, 이건 몇 줄 안 되는 노랫말과 몇 분 되지 않는 연주 속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구나 싶은 곡들. 내가 들었던 음악 중 그런 느낌이 가장 강하게 들었던 한 곡을 뽑으라면, 산울림 12집에 실린 <무감각>이다. 김창완이 작사, 작곡했다.


<무감각>은 한마디로 이별 이야기인데, 곡 속의 화자가 읊조리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나 무감할 수가 있나 싶다. 그는 이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상황에서도 이별을 느끼지 못하고, 상대방의 나직한 '안녕'이라는 말에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사라지는 이를 두고서도 붙잡지 아니한다. 센스 없는 사람. 눈치도 없는 사람. 그야말로 온몸이 무감각으로 뒤덮인 사람의 이별 이야기이다.


화자는 어째서 이렇게나 무감한 사람인 걸까. 아마도 오랜 연인이었겠지. 더 이상은 연애 초기에 느낄 수 있던 설렘이 사라지고서 많이 편해져 버린 사람. 그렇게 조금씩 무신경과 무감정과 무관심의 시간들이 늘어나면서 결국에는 아무런 감각도 남아있지 않게 된 사람.


그런데 곡 속의 화자는 상대방을 사랑하긴 했었나 보다. 이별 후에 헤어진 사람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고, 빈자리마다 그가 보이는 것 같다. 견뎌내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견딜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면 하고서 반복한다. 비록 헤어질 때는 무감각했던 이지만, 이별 후에는 하나 둘 감각을 되찾고서 괴로워하는 사람. 이별 후에 그는 다시금 예의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 이별의 아픔들을 견뎌내고 싶어 한다.


곡의 제목으로 쓰인 '무감각'은 이별의 과정에서 보인 화자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별 후에 화자가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정말 몇 줄 되지 않는 노랫말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상상되는 곡이다. 그들은 처음에 어떻게 만나 어떻게 사랑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언제부터 무감한 사람이 되었던 걸까. 그리고 그는 이별 후에 그 아픈 시간들을 잘 견뎌낼 수 있었을까.


화자에게는 분명 떠나는 그를 붙잡을 수 있는 시간도 몇 번이나 있었을 거다. 특히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볼 때면, 어서 빨리 달려가 그의 우산이 되어주기 좋았을 텐데. 핑계 대기에도 좋지 않은가. "이건 산성비야! 비 맞으면 머리 빠져!" 하면서라도.


음악에서든 문학 작품에서든 비의 종류와 양에 따라 비를 맞는 사람의 모습은 다르게 표현되지만, 우산 없이 비를 맞는 모습에서는 대개 애처로움이 그려지는 것 같다. 거기에 '뒷모습'은 애처로움의 대명사와도 같은 모습 아닌가. 우산도 없이 비를 맞는 뒷모습의 사람은 애처로움과 애처로움이 더해졌으니 얼마나 애처로워 보였을까. 다시 생각해도 <무감각>의 화자는 좀 너무하다 싶네.


아, 얼마 전 인터넷에서 글 하나를 읽은 적이 있는데 서구의 어느 도시에서는 비가 워낙에 자주 내려, 어지간해서는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그 도시 사람에게서는 우산 없이 비 맞는 모습이 애처로움 대신에 일상인 걸까. 글 말미에 굳이 이런 내용을 더하는 나도 참 센스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만.


덧붙임 - 산울림의 <무감각>이 좋은 사람이라면 비오(BE'O)의 <문득>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음악 장르와 보컬의 색깔은 전혀 다르지만, 이별 후 빈자리에서 상대방이 보인다는 내용이 어쩐지 닮아 있어서 번갈아 듣곤 하는 곡이다.



무감각.jpg


창가에 기댄 너의 머리 위에 어제처럼 뽀얀 햇살

아무 말없이 고개 숙인 모습에서

이별이라 알지 못했네


촉촉이 젖은 너의 그 눈동자 힘없이 잡은 찻잔 위로

나직이 스치는 안녕이란 그 말에도

이별인걸 알지 못했네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걸어

희미한 가로등과 불빛 흐르는 거리로 사라질 때도

나는 아직 알지 못했네


유난히도 길었던 하루

먼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쉬고 싶을 뿐


밤이 되면 습관처럼 떠오르는 얼굴

그때도 견딜 수 있다면

빈자리마다 앉은 그댈 보며

그때도 견딜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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