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대의 흐름과 고민의 필요성

by 이경



며칠 전 서점에서 소설책 하나를 들고 왔다. 서점 직원의 이야기를 다룬 <점장님이 너무 바보 같아서>라는 일본소설이었다. 몇 년 전 재밌게 읽었던 소설 <교열걸> 느낌도 났고, 가볍게 읽을 만한 소설이 필요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들고 온 책이었다.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란 기대와는 달리 책을 읽다가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나는 소설의 작가가 당연히 여성일 거라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작가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뛰어난 작가라면 소설 화자의 성별 따위는 크게 문제없이 쓸 것이다. 글이 잘 쓰였다면, 독자 역시 그런 작가와 소설 속 화자의 성별에 개의치 않을 테고.


하지만 글쓴이가 다른 성별의 몸에 대해서 묘사를 할 때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내가 <점장님이 너무 바보 같아서>를 읽으며 주춤했던 이유로는 소설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길게 늘어지는 점장님의 이야기에 평소보다 유난히 짜증이 나는 것을 깨닫고 곧 생리가 머지않았음을 떠올렸다.'


나는 가끔 남성 작가들이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 것을 두고 '출산'에 비유하는 것을 징그러워하는 편인데, 생리하는 여성을 표현하는 것 역시 비슷한 결이 아닌가.

이런 내용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정말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글쓴이로서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하기도 하고, 시대의 흐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포착을 해야 한다. 작가가 쓰는 단어마다 작가의 생각 한 조각과 다름없으니까.


이쯤에서 출판업계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다른 성별의 몸을 묘사하면서 일어났던 몇몇 큰 사건들을 돌아볼까.


-


2018년 <언더 더 씨>라는 소설집을 냈던 강동수 작가와 출판사는 이듬해 출판사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사과문을 올렸다. 어떤 사연이었을까.


<언더 더 씨>는 총 일곱 편의 단편이 묶인 소설집이었는데, 문제가 되었던 글은 표제작 '언더 더 씨'였다. 네티즌들은 소설 초반에 나오는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이라는 내용을 문제 삼았다. 여고생이 자두를 먹으며 자신의 젖가슴을 떠올린다는 설정이었다.


몇몇 네티즌들은 이 구절을 두고서 '한남문학', '개저씨'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남성 작가가 왜 여성의 '젖가슴'에 이렇게나 집착하느냐고 날 선 비판을 가했다. 그 어떤 여성도 과일을 먹으며 자신의 가슴을 떠올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뒤따랐다.


더 큰 문제는 이 여고생이 소설 속에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분하는 네티즌들은 점차 늘어났다. 사람들은 작가가 세월호 희생 여학생을 성적 대상화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인터넷 서점에서 소설집 <언더 더 씨>의 별점과 댓글 내용은 참혹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출판사의 출간 서적에 불매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강동수 작가는 사건 초반 이러한 비판에 '극렬한 페미니스트들이 내게 개저씨 딱지를 붙였다.'며 사과를 거부하였으나, 이후 태도를 고치고는 출판사 계정을 통해 사과문을 전달한 것이다. 다음은 그 사과문의 일부.


집필 당시엔 '성적 대상화'를 의식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해도 독자님들과 네티즌 여러분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젠더 감수성' 부족의 소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


글은 작가에게 문신과도 같아서 때로는 소급 적용되어 비판을 받기도 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런 소급의 비판이 가혹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발표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가 오랜 시간이 흘러 큰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2017년의 김훈이 그러했다.


김훈이 2005년 발표했던 단편 <언니의 폐경>에는 생리를 하는 여성이 묘사가 되었다. 김훈은 이 작품으로 2005년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 발표 10년이나 지난 2017년 이 작품은 뒤늦게 도마 위에 올랐다. 많은 여성들이 <언니의 폐경>에서 그려진 여성의 '생리'가 현실과는 동떨어졌다며 비판을 한 것이다.


한 네티즌은 김훈의 소설에서 묘사되었던 문장 하나하나를 꼬집으며 반박 게시물을 올리기도 했다. 다음은 네티즌의 반박 내용 중 일부.


생리는 '밀려' 나오지 않습니다. 피가 흐를 때 '뜨겁지' 않습니다. 방금 흐를 정도로 나온 생리혈은 물고기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글이란 정말 무섭지. 발표 당시에는 문학상까지 안겨주었던 작품이 10년의 시간이 지나 작가를 곤란케 만들었으니. 앞서 말했듯 작가의 작품을 소급하여 비판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이런 현상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시 앞서 말했듯 '글'은 '작가'에게 사라지지 않는 문신과도 같은 것이니까.


글을 쓰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단어 하나하나 내뱉을 때마다 치열하게 고민을 하는 것뿐. 특히 중년 남성이 다른 성별의 몸을 묘사할 때에는 더욱더.


-


내가 이미 몇 년이나 지난 강동수와 김훈의 사건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며칠 전 브런치에서 위험한 글 하나를 읽었기 때문이다. 소설이라고 쓰인 그 글에서는 고3 여학생의 몸을 묘사하며, '젖무덤'과 '우유 빛 뽀얀 가슴' 같은 표현이 나왔다. 이런 표현이 1960년대쯤에 나왔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테지.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우리는 2023년에 살고 있다.


댓글 창에서는 누구 하나 해당 글의 비판 없이, 재미있다는 댓글들이 이어졌다. 글을 쓴 사람이 무명이어서 다행이지, 만약 그가 강동수나 김훈 같은 유명 작가였다면 과연 이런 칭찬의 댓글들이 이어졌을까. 글을 쓴 이는 자신의 글을 가리켜 '청춘 로맨스물'이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보기엔 여학생을 성적 대상화로 삼은 중년 남성의 섹스판타지에 불과한 글이었다.


이런 글은 정말 위험하다. 시대의 흐름을 전혀 읽어내지 못한 채, 별다른 고민 없이 쓰인 글처럼 보인다.

작가 지망생으로 가득한 글쓰기 플랫폼에서 우쭈쭈 하는 칭찬만을 받다 보면 사람은 자신의 글에 둔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글쓰기 플랫폼에서 벗어나 조금 더 넓은 곳에 이런 글이 놓일 때면, 예의 '한남문학'이나 '개저씨'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글은 작가에게 지우기 어려운 문신과도 같다. 글을 쓸 때에는 정말 정말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베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