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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와 종이 출력

by 이경



직장 생활하면서 프린트는 일상이다. 업무 차원에서 출력하는 경우가 많지만, 팩스에서는 쓸데없는 스팸 내용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최근에 가장 골치 아픈 팩스는 4대 보험 자동 이체하라는 (안 합니다. 안 할 거예요.) 내용이다. 이 외에도 각종 대출 안내 팩스들이 그렇다. 스팸은 맛있는데 스팸 메일과 팩스는 왜 이렇게 싫을까.


암튼 이렇게 쓸모없게 뽑힌 종이들은 이면지로 활용한다. 때론 낙서도 하고, 때론 메모도 하고, 아주 심심할 때는 종이접기도 한다. 정서 불안일 때는 쓸모 없어진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한다.


세상 흔한 것이 종이라지만 이렇게 잘못 뽑힌 종이들은 사실 아깝다. 종이뿐만 아니라 잉크도 아깝다. 특히나 업무 차원에서 컬러로 출력한 것이 오탈자가 있거나 하면 그 아까움은 배가 된다. 또 뽑아야 하니까.

잉크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 사무실에는 항상 넉넉하게 잉크를 사다 놓는다. 가끔 문구점에서 프린터용 잉크를 사면 그 가격이 만만치 않다.



요즘 사람들은 글을 쓸 때 대부분 한글이나 워드를 쓸 테다. 물론 여전히 예전 방식대로 원고지에 육필로 쓰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 숫자는 점점 줄어들 테지. 나는 지독한 악필. 내가 쓴 글씨 내가 못 알아보고 암호 해독하듯 할 때도 있다.


나는 항상 한글 파일을 열어놓고 글을 쓴다. 컴퓨터로 글을 쓰다 보면 가끔 출력해서 보는 경우도 있다. 컴퓨터 모니터로 글을 볼 때와 종이로 출력해서 보는 글은 확실히 그 느낌이 다르다. 그래도 보통은 내가 쓴 글을 출력할 일이 없다. 종이도 아깝고 잉크도 아까우니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 글은 그저 한글 파일 안에 머물러 있다.



지난봄 한 편집자를 만났다. 내가 그에게 보낸 원고 파일은 A4로 70매 정도였다. 항상 컴퓨터 모니터로만 봐온 내 글이었다. 70매나 되는 원고를 종이 출력해서 볼 일이 뭐가 있을까. 종이도 아깝고 분명 잉크도 많이 들어가겠지. 프린터가 70장이나 되는 종이를 집어삼키고 까만 글씨를 입혀 내뱉을 때는 과부하가 걸릴 수도 있겠지. 종이가 씹혀서 엉뚱한 종이에 글씨들이 나눠져 출력될 수도 있겠지. 까만색 잉크가 점점 줄어들어 희뿌연 회색으로 나올 수도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차마 출력해서 보지 못했던 원고 70매.


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편집자는 서류 가방에서 종이 뭉태기를 꺼냈다. 그 종이 뭉치에는 내가 그에게 보낸 글이 출력되어 있었다. A4 한 장에 한글 파일 2매 분량을 나눠서 출력한 종이는 언뜻 보기에 마치 책처럼 느껴졌다. 계산이 맞다면 그 종이 뭉치는 A4 서른다섯 장이었을 거다.


편집자는 그 종이 뭉치를 가리키며 내가 쓴 글이 분명 책으로 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 날의 편집자가 내게 해 준 많은 이야기들이 감동으로 다가왔지만, 무엇보다 누군가 내 글을 종이에 출력해서 봤다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에게 내 글은 대출 안내나 4대 보험 자동이체처럼 버려지는 글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묻고 싶었다.

아이고, 편집자 선생님.

아이고, 제 원고를 출력해서 오셨네요.

아이고, 종이가 아깝지 않던가요.

아이고, 잉크가 아깝지 않던가요.

프린터는 제 글을 쑥쑥 잘도 뽑아내던가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이후에 출판사의 사정으로 출간 계약은 안되었지만, 누군가 내 글을 종이에 출력해서 보아주었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고맙다. 그날 내가 본 출력물은 이면지도 아닌 무척이나 새하얀 종이였다. 손 끝을 대면 베일 것만 같은 새 종이에 내 글은 출력되어 있었다.



글쓴이가 출판사에 글을 보내고 채택이 되면 출간 전에 편집자와 교정지를 주고받는다. 요즘은 실제 종이 뭉치가 아닌 PDF 파일을 주고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실제 종이 출력이든, PDF 파일이든 '교정지'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건 분명 출력을 해도 아깝지 않은, 꼭 출력을 해서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뜻일 테다. (빨간 펜이 잔뜩 그어지긴 하겠지만.)


프린터와 팩스가 뿜어내는 쓸모없는 글을 보다가 문득 '교정지'에 담긴 뜻을 생각해보았다.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글씨들이 종이에 새겨지고 버려진다. 훗날 실제로 편집자가 나에게 교정지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교정지를 한참 동안 끌어안을 테다. 한글 파일 안에서만 살던 내 글이 종이에 출력되어 나왔구나. 컴퓨터 세상 밖으로 나왔구나, 하면서.


누군가 내 글을 출력해서 보아준다면, 그게 교정지든 뭐든.

종이와 잉크가 아깝지 않은 글이라면 좋겠다.

나무가 아깝지 않은 글이라면 좋겠다.

부디 버려지지 않는 글이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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