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
끓어오르는 조연의 서러움

천호동 소문난 집, 45년 뚝심으로 끓인 김치국 백반

by 까칠한 한량


눈이 내리고 날이 차가워지는 이런 날,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원초적인 맛을 찾게 마련이다.

화려한 맛 대신, 스텐 대접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서린 칼칼한 김치국이나 시원한 소고기무국

간절하게 생각나는 날씨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밥상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이 생각나는 맛이 겪는 조연의 서러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소고기무국이나 김치국처럼, 밥상 위에서 가장 흔한 음식들.

하지만 그들은 식당에서 좀처럼 메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가장 쉽게 푸대접받는 곁가지들이다.


그들의 숙명은 언제나 메인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것이다.

소고기무국은 고깃집이나 육회집에나 가야 비로소 옆자리에 내주는 신세다.

허전한 속이나 달래라고 덧대어주는, 그저 밥상을 채우는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김치국 또한 백반집을 전전하다 운 좋게 오늘의 국으로 만날 수 있을 뿐,

그 깊은 맛을 제대로 끓여 풍성하게 내어주는 곳을 서울 도심에서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군산의 이름난 밥집에나 가야 비로소 큼직한 무와 소고기가 어우러진 깊은 맛으로 제 대접을 받는 소고기무국처럼, 김치국의 운명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다.


5_a82Ud018svc1ki784dd98bpn_oh6i9t.jpg


발견했다.천호동 골목길, 45년 김치국 백반


그런 갈증 끝에 발길이 닿은 곳이, 천호동 먹자 골목의 왁자지껄한 중심,

시간이 멈춘 듯 깊숙이 박힌 45년 노포, 소문난 집이었다.




먹고나니 낡은 외관과 불편한 시설들, 화장실이나 주차장 따위의 사치는 애초에 논할 가치도 없었다.

이곳은 미식의 성지가 아니라, 허기진 속을 채우려는 평범한 이들의 정겨운 한끼의 피난처였다.


7,500원 김치국 백반은 진정한 맛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준다.


둥그런 접시 두 개에 소복이 담긴 반찬은 무려 10가지.

그러나 그 가짓수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반찬 하나하나에 허투루 한 것이 없다.


6_482Ud018svc1mnwfjerc9kr6_oh6i9t.jpg


직접 불에 그슬려 구워낸 김의 고소함, 오이지의 꼬들거림과 적당한 염도.

모두 주인공인 김치국을 위해 존재하는, 정확하게 계산된 조연들이다.


6_c82Ud018svc35ocy4uvvany_oh6i9t.jpg


주연인 김치국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멸치 육수의 은은하고 깊은 감칠맛 위에 신김치의 시원하고 칼칼한 산미가 정확히 균형을 잡는다.

싸구려 조미료의 텁텁함이 전혀 없이, 입안을 깨끗하게 정리하며 마무리되는 맛이다.


6_882Ud018svcajmff55aovds_oh6i9t.jpg


기본이 뚝심이 될 때, 맛은 투명해진다.


두 번의 합이 만드는 완벽한 밥상



첫 단계로 밥 한 공기를 김치국과 반찬으로 깔끔하게 비워낸다.

칼칼한 국물과 정갈한 반찬이 주는 개운함과 정갈함의 조화가 허기진 속을 부드럽게 감싼다.


5_682Ud018svcfu3fjcgfhm8q_oh6i9t.jpg


두 번째 단계호 밥을 한 공기 더 주문해 대접에 옮긴다.

찬으로 나온 나물 다섯 가지를 넉넉히 올리고,

쿰쿰한 청국장 한 숟갈, 참기름과 고추장을 더해 비벼 먹는다.


청국장의 구수하고 묵직한 맛이 비빔밥의 고소함과 섞여,

앞서 김치국이 남긴 깔끔한 여운을 무너지지 않게 받쳐준다.


5_e82Ud018svc1vx0xa45ez3bc_oh6i9t.jpg


가장 흔한 재료로 가장 완벽하고 풍성한 밥상을 차려내는, 노련한 솜씨다.


주차와 시설의 불편함은 이 밥상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통행료일 뿐이다.

그 후 두 번을 더 찾아가 천호동 지하 공영 주차장까지 기어이 찾아낸 나의 집념.


6_182Ud018svc9tgm3b3ij4st_oh6i9t.jpg


맛의 본질에 충실한 집.

밥상 위에서 가장 흔했던 조연을, 가장 맛있는 주인공으로 만든 이 45년의 뚝심 앞에서,

나는 그저 고개를 숙여 연신 먹어되고는, 한 그릇의 따뜻한 위로를 얻어 간다.


소문난집 서울 강동구 올림픽로70길 57




#브런치맛집 #미식에세이 #천호동맛집 #노포기행 #김치국백반 #소고기무국 #조연의승리 #45년뚝심 #정갈한밥상 #눈오는날의위로 #까칠한한량

월, 목, 일 연재
이전 03화부대찌개 유목민 생활, 여기서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