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고기 그리고 철판 위 가을

35번 국도를 따라 달려간 단풍과 고기의 여정

by 까칠한 한량


가을이 내려앉은 어느 날, 안동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이 길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쉐린 가이드'가 선정한 아름다운 도로로,



봉화를 지나 범바위 고개에 이르면,

강원도와 경북의 경계 너머로 펼쳐지는

형형색색의 산들과 청명한 하늘이 함께합니다.



단풍 따라, 공기 따라,

천천히 달리다 보면 어느덧 도착한 곳,

바로 고원의 도시 태백입니다.

태백 시장 안, 오래된 간판 하나

현대실비 — ‘설비’ 아닙니다. 고기 실비 맞습니다.



태백 시장 한쪽 골목,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현대실비.

혹시 ‘실비집’이 생소하다면 설명을 덧붙이자면,

‘실비’란 ‘실제 비용(實費)’,

즉, 비용을 아끼며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서민식당을 뜻합니다.



특히 광부나 노동자들이 많은 탄광 지역에서,

작고 허름하지만 정 많은 밥집으로 오래 사랑받아온 형태죠.

요즘은 찾기 어려워진 이 실비집이,

태백에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곳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집 — 현대실비입니다.



철판 앞자리, 그리고 '고기 발골 쇼'

식당 문을 열자

고기 굽는 소리와 함께 정겨운 왁자지껄함이 반깁니다.

벽에는 오래된 달력,

철판 앞자리엔 이 집 단골들의 흔적이 남아 있죠.

그리고 그 한켠에서,


사장님은 막 들여온 소고기를 정교하게 발골(剝骨)하고 계십니다.

뼈에서 살을 떼고, 부위별로 정리해 나가는 숙련된 손놀림.

그 모습은 마치 작은 ‘고기 해체 쇼’ 같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운 좋게 철판 바로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말린 도라지 무침과 지글지글 고기

모둠 2인분과 된장찌개를 주문.

아쉽게도 육사시미는 오전에 모두 소진됐다고 합니다.


대신 이 집의 반찬 중 별미인 말린 도라지 무침이 먼저 나옵니다.

식감은 진미포처럼 쫄깃,

씹을수록 도라지의 향과 단맛이 은은하게 번집니다.



잠시 후 철판 위에 고기가 올라가고,

노릇노릇 익어가는 소리에 군침이 돌기 시작합니다.

고기 네 점을 올려,

앞뒤로 잘 구워

바로 입으로 —

“와우.....”



굳이 한우 등급을 따지지 않아도,

잡은 지 얼마 안 된 고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한 육즙과 탄력 있는 식감.

상추에 싸 먹고, 소금에 찍어 먹고,

그저 ‘정신없이 맛있다’는 말만 반복하게 됩니다.



직접 담근 된장, 그리고 선지해장국

고기를 먹고 나면

또 하나의 시그니처 메뉴, 된장찌개가 나옵니다.

사장님이 직접 담근 된장과

부드럽게 푹 익은 우거지가 어우러져

진한 맛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밥 한 공기는 순식간에 비워지고,

그 여운을 안고

선지해장국도 추가 주문.

선지는 싱싱하고 잡내 없으며,

국물은 깊고 시원합니다.

밥을 말고 깍두기 하나 올려 먹으면,

배부름도, 시간도 잠시 잊게 되죠.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워야

비로소 수저를 내려놓을 수 있는 맛입니다.



태백, 실비집의 온기

탄광의 굉음이 멈춘 지 오래된 태백.

사람들은 떠나고,

그 시절의 기억만이 골목에 남아 있지만 —

오랜 시간, 이 도시의 식탁을 책임져온 실비집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묵묵히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아끼고 기억하고 싶은 집.

현대실비.


소란스럽고 투박하지만,

한 점 한 점 구워지는 고기와

사장님의 정성, 그리고

푸근한 된장찌개 한 그릇에

그 시절의 정이 살아 있습니다.



현대실비

강원도 태백시 시장북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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