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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 숙종 Jan 09. 2019

14. 천국에 있을까?

  고양이를 만나지 않고 골목을 지나간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디에도 고양이는 있다. 요르단에 고양이가 많은 이유는 요르단 사람들이 개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돼지고기를 안 먹듯, 개도 불결하다는 인식 때문에 기르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이 개를 키우듯 웬만한 가정은 고양이를 키운다. 가정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버려져 길고양이가 되서 번식되어 골목엔 온통 고양이 세상이다. 


 나는 고양이를 싫어한다. 위험 앞에서도 표정이 바뀌지 않는 영묘한 동물이다. 눈을 맞추기 두렵다. 그렇다고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집에서 13년간 강아지를 키웠다. 이름이 ‘딸기’였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로 상징되는 난초처럼 ‘딸기’는 우리 가족을 길들였다. ‘딸기’는 우리를 귀찮게 했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했다. 추운 겨울밤에도 산책을 가자고 보채면 나가야 했다. 특히 해외여행은 ‘딸기’를 두고 떠날 수 없기에 여러 번 포기해야 했다. 가축병원에 맡기면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철망에 갇혀 목 빠지게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래서 지인에게 맡기고 여행을 다녀오긴 했지만, 쉽게 부탁할 것이 못된다. 애완견은 아이를 키우는 것과 맞먹는다.   

  

 요르단 해외봉사 활동 2년 6개월쯤 됐을 때, 둘째 딸한테 문자가 왔다. 

 “아빠! ‘딸기’가 많이 아파. 오래 못살 것 같아. 어떻게 해?” 

 ‘딸기’ 나이는 13살이었다. 강아지 수명은 10~15년이다. ‘이제 떠날 때가 됐구나.’하고 나는 체념했다. 아내와 딸은 ‘딸기’를 데리고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병원’에 입원시켰다. 의사는 하루를 넘기기 어렵다고 고개를 저었다. 다음날 ‘딸기’는 죽었다. 죽기직전 응급실에서 숨을 헐떡이다 가족을 보고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그게 ‘딸기’의 마지막 인사였다고 딸이 문자를 보내왔다.     


 슬픔은 온 가족을 덮쳤다. 대학교 1학년 때 막 태어난 강아지를 안고 들어와 이름을 ‘딸기’라고 지어준 큰 딸은 파견 근무지인 모스크바에서 울었다. 집에서 울고, 사무실에서 울고 한동안 큰 딸은 회사 일을 못할 지경이었다. 가족 중에서 ‘딸기’와 가장 안 친했던 나도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났는데, 옆에서 마지막을 지켜본 아내와 둘째딸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아지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슬픔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이해하지 못했을 게다. ‘딸기’의 슬픔을 체험해본 나는 함께 해외봉사 활동을 하는 단원의 슬픈 소식을 듣고,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누구나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녀는 요르단에 파견된 지 1년6개월 정도 됐다. 아랍어식 이름은 ‘파라(사회복지 단원)’다.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협력활동 ‘시네마 천국’에 뒤늦게 합류해서 서무를 맡고 있었다. 활동 리더인 나는 회계와 서무한테 많은 도움을 받는다. 18번째 행사를 팔레스타인 국경마을 ‘조우페’에서 하기로 협의 했다. 단원들과 함께 답사까지 마친 상태였다. 밤에 영화와 공연을 보는 대규모 야외 행사며 마을 전체가 관심을 끄는 축제다. 팀원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모여 공연 연습을 했다. 우리가 선보일 공연은 한국 전통 문화인 ‘사물놀이’와 ‘난타’였다. 특히 ‘난타’는 안무가 까다롭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될 즈음 뜻하지 않는 문자가 왔다. ‘파라’였다.    


 “선생님 저는 이번 ‘조우페’ 행사에 참석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난 이유를 묻지 못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서무가 빠지면 행사 진행이 복잡해진다. 이제까지 짜놓은 ‘난타’ 포지션이 확 바뀌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행사진행표를 다시 수정해야 했다. ‘파라’는 그날부터 잠수했다. 나는 그녀와 가장 친한 단원에게 그의 안부를 물어봤다. “전화해도 울기만 하고 이유는 말하지 않아요.”라고 한다.   

  

 일주일이 지난 후 그녀집 근처에 약속이 있어 커피숍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파라!’ 집 앞에 왔는데 커피 한잔 하자.” 

 그녀가 나오진 않았으나 마음은 열 듯 했다. 그래서 혹시 가족 문제냐고 물었다. 그녀가 그건 아니라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그 다음 통화에서 그녀는 나한테만 이유를 말해줬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때문이에요.”    


 그녀는 버려진 강아지를 데려와 애지중지 키우다가 가족한테 맡기고 요르단으로 왔다. 10일전 가족한테 충격적인 소식이 왔다. 

 “강아지가 가족과 산책 나갔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는 문자를 받은 것이다. 그녀는 이제까지 가족과 통화 한번 안하고 방안에만 있었다고 했다. 강아지가 죽은 사연을 가족한테 듣는 것조차 참혹한 고통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누굴 만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와 통화한 그날 이후 ‘파라’는 방에서 나왔다.  

  

 ‘딸기’의 유해는 항아리에 담겨 그가 늘 잠자던 안방에 놓여 있었다. 모스크바에 있던 큰 딸과 내가 휴가차 집으로 돌아갔을 때, 유해문제를 상의했다. 나는 집주변 낮은 언덕에 수목장을 하자고 제의했다. ‘딸기’가 워낙 산책을 좋아했으니, 항상 다니던 길가 나무 밑에 묻어 두자고 말했다. 딸들은 반대했다. 밖에 두면 외로울 거라는 이유다.

 “늘 집에 혼자 있었는데, 밖에서 또 혼자 있게 할 순 없어!” 

 ‘딸기’는 지금 우리 집 거실 고무나무 아래에 묻혀있다. 얼추, ‘딸기’가 우리에게 올 때쯤 심은 나무일게다. 고무나무는 딸기와 함께 자란다.  


 ‘딸기’는 13년 동안 우리 가족이었다. 우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그도 덩달아 꼬리를 흔들며 안겨왔다. 화장실에 오줌을 눌 때마다 착하다고 간식을 줬다. 간식 주는 것을 잊으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던 아이였다. 모두가 떠나가듯 그도 떠났다. 요로결석으로 오줌관이 막혀 힘들어 하면서도 4년을 버텼다. 그렇게 씩씩하던 ‘딸기’가 우리 곁을 떠났다. 


 ‘딸기’가 떠난 후 큰 딸 카카오톡 바탕 화면에 ‘딸기’ 얘기가 쓰여 있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딸기’가 가장 먼저 마중 나올 거야!”    


 나는 생각했다. 

 “‘딸기’는 천국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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