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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봉 Oct 06. 2019

남편의 휴직 한 달 그 후

번외 편(3)- 그는 어떤 삶을 그려낼까

여느 때 같으면 월급이 들어왔어야 할 25일이다.

길게 본 인생 중 그깟 1년쯤 연봉만큼의 투자라 생각하면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았던 지난 시간들이 어쩌면 조금 무모한 일이었나 싶은 생각이 살짝 스치긴 했다. 그래도 이번 결심의 가장 큰 부분이었던 경제적인 부분은 처음부터 각오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마이너스 통장의 잔고를 보고도 좀 무뎌지지 않을까(과연)



휴직 전 마지막 퇴근을 앞두고
기쁨의 미래를 그리던 유서방은
휴직 첫날부터 불안의 무덤 속에 갇혀버렸다.



다른 때 같으면 연차 한번 썼다 생각해도 될 날일 텐데, 유서방이 보여주는 상태는 나의 예상을 너무나 빗나간 모습이었다. 쉐이핑을 배우러 가는 날짜가 아직 확정되지 않아 당분간 1-2주 정도는 뜻밖의 자유시간을 얻었는데도.


유서방은 출근하지 않는 월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다운되더니 하루 종일 뭔지 모를 무기력함과 싸우는 중이었다. 즐거운 모습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것만 시작하면 기쁨의 미래를 그리며 훨훨 날아갈 줄 알았는데, 나 역시 그런 모습을 지켜보자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솔직히 짜증이 났다. 차라리 지난번처럼 너무 신나 해서 꼴도 보기 싫은 게 나을 정도였다.


그토록 원하던 휴직도 했고,
대체 나는 이런 모습을 얼마나 더 보고 있어야 해?


유남매를 다 재우고 난 그날 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 종일 말도 없이 한숨만 푹푹 내쉬던 그에게 나는 짜증 섞인 투로 토로했다. 내 입장에서는 이제 그에게  '휴직하고 양양에 가는' 이보다 더한 제안을 할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없어서 괴로워


순간, 저 표현에 화가 치밀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할 일이고, 그동안 일만 했으니 자신에게 주는 휴식도 할 일이다. 단순히 회사를 가지 않아 일이 없다고만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 유서방. 성미가 급하고 빠른 결론을 내리기 좋아하는 그가 막상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이 닥치자 많이 불안해진 것 같았다.



내일 당장 양양에 가도록 해


나는 그냥 그를 보내버렸다.

유서방은 그런 나에게 편지 한 장을 남겨두고 다음날 새벽에 양양으로 떠났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유서방체


가서 서핑이나 실컷 하라고 보냈는데, 바다 역시 마음처럼 되지 않는 유서방과 같은 상태인 듯했다.


인내와 여유를 가지라는 메시지가
파도를 타고 그에게 왔다.
거품지옥.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바다는 다 이유가 있다.



그 후 유서방은 2주 정도의 자체 휴가를 보냈다. 그동안 나는 그의 멘탈관리를 도왔다. 막상 회사에 안 가니 마치 지난겨울 나의 퇴사 초창기 그 마음(=배우자의 눈치를 보는 괜한 마음)인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낸 휴직인데 리프레쉬 휴가 간 듯 그 정도는 즐기라고 일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파도를 확인하고 파도 좋은 날 바로 나가서 서핑을 할 수 있는 그 시간을 말이다.


마음 단련의 시간을 보내고 난 유서방은 공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복리후생이라면 큰 검은 개 쿠로와 매일 같이 산책을 할 수 있고, 그분의 정성이 담긴 핸드드립 커피를 무한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공방에 출근을 시작한 지 한 달, 아직 보드를 깎기보다는 공방 정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하느라 회사 다닐 때보다 야근은 더하고, 서핑은 더 못하는 것 같았지만 배움의 길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게다가 매주 서울에 오는 유서방에게 길에 버리는 돈을 좀 아껴보자며 이제 덜 올 때도 된 것 같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매주 서울-양양고속도로를 새벽같이 오고 가는 모습이 좀 짠하기도 하다. 그리고 나 역시 양양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거나 집에 들어올 때까지 잠은 잘 못 잔다. 그래도 본인이 사서 하는 고생이라 그런지 나한테 오히려 괜찮다고는 하는데, 문득 한 번씩 드는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



그냥 회사 다니면서 돈 벌고
주말에 서핑하는 삶도 괜찮은 것 같아



사실 지금까지 들은 말 중 가장 나를 안심시킨 말이었다.

이제 남은 11개월, 그는 또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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