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 18주차 - 맥봉이 깎아준 Bob Mctavish 만나던 날
계속된 태풍과 갑작스러운 이사 준비로 거의 한 달만에 양양에 갔다.
유서방이 양양에 자리를 잡고서 주말마다 서울에 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양에 있는 유서방이 회사 다닐 때보다 서핑을 못하고 있어서 (역시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일로 만나면...!) 이번엔 나 홀로 두 아이를 데리고 양양으로 향했다.
이번 주는 양양 서핑 페스티벌 주간(2019.10.11-13)
그런데 일본으로 간 태풍 하기비스로 인해 동해바다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람도 심하게 불고, 이런저런 기상상황 때문인지 생각보다 사람은 적었다. 무엇보다 축제의 꽃이라는 서핑대회 구경을 갔더니 오후 1시부터 내린 풍랑경보로 비기너 부문은 취소가 되고, 프로 부문마저 풍랑경보 시간 이전까지 끝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번 주에는 차트상으로도 파도가 높아서 서핑할 생각은 진작에 넣어뒀다. 그 대신,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리의 첫 서프보드인 맥봉이를 깎아준
밥 맥타비쉬 (Bob Mctavish)가
이번 축제에 맞춰 양양에 온다고 했다.
유서방이 쉐이핑을 도전하는 데 가장 큰 영감을 준 인물이다.
밥 할아버지는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보드를 깎는 서프보드계의 레전드 쉐이퍼이자 아들과 함께 맥타비쉬(Mctavish)라는 이름을 걸고 핸드메이드 서프보드를 만드는 사람이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마음으로만 가본 호주 바이런베이(Byron Bay)의 맥타비쉬 본사에는 쇼룸에 각종 서프보드와 자체 브랜드 의류가 (왠지) 멋지게 진열되어있다. 그리고 카페로 보이는 곳에서 파는 파니니와 바게트 샌드위치가 침샘을 자극한다. 가끔씩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유서방을 호주로 보내고 싶은 지경이다. (불과 6개월 전에는 몰랐던 존재들)
서핑 입문 6개월 만에 우리에게 그런 곳에서 만들어 바다건너 온 맥봉이를 깎아준 밥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거다.
유서방에겐 더욱 의지를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나 역시도 만나보고 싶었다. (마음만큼은 유서방의 호주행을 기리며...)
우리는 운명일까
내가 양양에 도착한 금요일 저녁부터 밥 할아버지와의 동선이 묘하게 겹쳤다. 남애리 도착 5분을 남겨두고 유서방에게 전화가 왔다.
얼마나 남았어? 지금 맥타비쉬 남애 3리에 와있네
유서방에게 지금 당장 달려가서 아는 척을 하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라고 했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그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쉽게도 내가 도착하고 맥타비쉬는 없었다.
몇 시간 후 저녁을 먹고 팔봉 서프 숙소로 가는 길,
사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좀 전에 작업실에 왔다 갔다
양양에 있는 쉐이퍼의 작업실들을 도는 모양이다. 그렇게 또 엇갈렸다.
다음날, 우린 서핑대회 구경을 하느라 축제 현장에 있었다. 바로 그때, 맥타비쉬가 우리 눈앞에 등장했다.
전문 포토그래퍼를 대동한 걸 보니, 말로만 듣던 레전드가 아니라 진정한 장인의 포스가 느껴졌다.
유서방은 괜히 나중에 보면 된다며 다가가길 어려워했지만,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을까 싶어 내가 먼저 슈러스 사장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공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그는 맥타비쉬에게 유서방의 현재 상황을 통역해주었다.
영어를 곧잘 하는 유서방은 장인을 눈 앞에서 본 기쁨에 어버버 하기만 했다. 대신 맥타비쉬에게 악수와 눈 맞춤을 한 후 자신의 핸드폰 배경화면을 내밀었다. 유서방은 휴직을 하기 전부터 아이폰과 카카오톡의 배경화면에 밥 맥타비쉬가 작업하는 사진을 넣어두고 있었다.
I respect you!
유명 연예인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이 한 분야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되면 아마도 그렇겠지.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파티에 참석했다.
조촐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맥타비쉬와의 추억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흡사 팬미팅 같은 분위기였다. 분위기에 취해 우리도 그의 자서전 한 권을 간직하기로 했다.
그는 한국의 서핑 바이브가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호주엔 대부분 남자 서퍼가 많은데, 한국에 오니 여성 서퍼도 많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고 자서전을 들고 간 유서방에게 사인을 남겨주며 이런 말을 전했다.
안경 참 멋있네요
오늘의 이 만남은 많은 걸 내려놓고 쉐이핑 공부를 시작한 유서방에게 앞으로 어떤 의미로 남을까.
서핑을 하지 않았으면 평생 모른 채 살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삶이란, 선택이란, 인연이란,
어떤 모습이 되었든
참으로 귀하다.
+
다음날 맥타비쉬 일행은 서핑을 타기 위해 남애3리를 다시 찾았다. 그러고 나서 유서방이 양양에서 가장 애정 하는 맛집 삼교리 옛날 동치미 막국수 집에 갔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한국에서 남긴 발자취와 유서방의 연결고리는 (우리만의 억지일 수도 있겠지만) 그 언젠가 호주 바이런 베이에서 만날 수 있는 날이 있을 거란 약속의 연결고리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