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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Nov 23. 2018

너를 통해 나를 보는 것의 당혹감과 기쁨

Call me by your name

너를 통해 나를 본다.


상당히 진부한 표현이지만 관계에 있어서 이만큼 더 적절한 표현도 없는 거 같다. 그녀 혹은 그의 반응과 표정, 그리고 미묘한 호흡의 변화만으로도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영화에서처럼 상대를 보며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타자화하고 다시 동일시하지 않더라도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걸 그녀를 보며 알게 된다. 


아직 가려져 있는 게 있는 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테이블 위에는 책들이(보지도 않으면서) 항시 놓여 있고, 소파나 행거에는 외투 등을 휙하니 걸쳐 놓는다. 그렇다고 막 너지르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다. 다만 약간의 디테일이 모자라다고 할까? 안 보는 책은 책장에 넣어두거나(근데 왠지 볼 것만 같아 못하겠다...) 옷은 옷걸이에 걸어두는 것 같은 '2%'가 부족하다. 그리고 세탁 후 옷을 갤 때도 각이 약간 아쉽다. 아침 조회를 위해 모든 학생들이 운동장에 열을 맞춰 섰는데 조금은 얽히고섥히듯 애매하게 줄을 맞춘 거 같달까?


아내에게는 확실한 기준이 있다. 긴 옷은 어디를 어떻게 접어서 이렇게 정리한다거나, 짧은 옷은 저기를 이렇게 개서 딱 각을 맞추는 프로토콜이 있다. 다른 것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파리에 집을 구하고 살림살이를 장만하기 위해 쇼핑몰에 들렸다. 프라이팬과 냄비 및 주방용품. 먹고살려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난 요리하는 걸 좋아하니 이왕이면 바닥에 안 눌어붙는 괜찮은 걸로 사고 싶었다. 테이블과 의자, 공부하려면 당연히 있어야지. 약간 가격대가 있는 접시와 컵, 살짝 사치스럽지만 그래도 신혼집인데 조금은 호사를 부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오케이.


얼추 필요한 것들을 다 샀다고 생각했는데 아내가 꼭 볼 게 있다며 다른 층으로 데려갔다. 수납용 바구니라고 해야 할까 박스라고 해야 할까 여튼 그걸 몇 개 사야 한다고 했다. 속으로 내심 "음?" 했다. 집에 옷장과 수납장이 다 있는데? 알고 보니 화장실에는 헤어드라이기와 세면도구 등을 담을 통이 있어야 하고, 방에는 온갖 잡동사니들, 예를 들면 가위와 칼, 테이프 같은 것들을 당장 쓸 것과 안 쓸 것들로 분류해서 담아야 했다. 그 외에 옷을 따로 담을 박스도 필요했다. 사실 이거까지는 생각 못했다. 한편으로는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 것들인데 필요하나 싶었다. 그래도 나쁜 건 아니고 또 깔끔한 건 좋으니 그러자고 했다(근데 이 수납통을 사려고 쇼핑몰 세 군데는 다녔던 듯하다). 다만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가 아내와 나의 차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우리 사이에 여전히 알아야 할 게 있네?"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전에도 깔끔한 걸 좋아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 실현하는 미묘한 디테일은 서로 생각하는 게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었으니까. 


같이 조깅을 하다 아내의 학원 시간 때문에 종종 혼자서 하고 있다.


한 번은 아내가 "색이 있는 옷은 따로 빨아줘"라고 했다. 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정말 하얀 것들만 빼놨다. 노랑, 분홍, 민트 등은 어쨌든 색이 있는 거니까 하며 다 같이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그런데 약간의 미묘한 문제가 발생했다. 빨래를 할 때 검은 면바지를 같이 넣었는데 아내는 "검은 바지를 같이 빨았네...? 분홍색 옷에 검정물 든 거 같아"라고 했다. 괜히 뭔가 억울했다. 사실 전에도 이 바지는 몇 번 빨았었던 거고(아내는 이번이 처음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색깔 있는 것들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인데 뭔가 잘못한 거 같았다.


아내는 가끔 '엄마(나에게는 장모님)의 방법'이라며 집안 살림 팁을 알려주곤 한다. 앞서 말한 옷 개는 법 같은 게 그런 거다. 내가 옷들을 걷어 개기 시작하면 아내는 슬그머니 내 옆으로 와서 한참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다 안 되겠는지 "봐봐. 이런 옷은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접으면 이쁘게 할 수 있어. 엄마한테 배운 거야"라며 시범을 보인다. 그러면 내가 "오, 그렇구나"하며 따라 하길 바란다. 그리고 사실 이 방법이 훨씬 낫기는 하다.


솔직히 말해 나의 집안일도 '엄마의 방식'이다. 옷을 개는 것부터 빨래하는 것까지. 다만 우리 엄마는 손세탁을 해야 하는 옷들이 아니면 한 번에 다 같이 돌렸고, 가끔 내가 "청바지는 따로 빨아야 돼!"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정리도 책은 책장에, 옷은 옷장에, 잡동사니는 서랍에 정도였을 뿐, 정리정돈보다는 보관에 더 가까웠다. 그러다 안 쓰는 것들이다 싶으면 한꺼번에 왕창 버렸다. 문제는 우리 모두 각자의 '엄마의 방식'을 배워왔는데 이게 서로에게 딱 들어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에게 빨래 개는 법을 알려주는 아내를 보면서 내가 갖고 있는 틀을 본다. 그녀 역시 그러는 자신을 보면서 자기 안의 틀을 느꼈다. 그렇다고 잘/잘못을 가릴 수 없다 보니 한편으론 불편함과 불만을 느끼면서도 뭐라고 말을 꺼내기 어렵다. 이제 우리 모두 서로가 갖고 있는 틀을 보여주고 보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는 서서히 드러나는 우리가 몰랐던 자기의 틀들을 맞추고 조립하면서 '엄마의 것'이 아닌 우리 만의 틀을 만들어야 할 때인 거 같다. 


서로에 대해 알만큼 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린 서로를 보면 알아야 할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많다.


이곳에서야 알게 되다니.


* 이 글은 아내가 쓴 <8년을 사귀었어도 너를 다 알지 못했네>에 대한 저의 입장입니다. 


*추가의 변

- 위의 글에서, 변기의 튄다는 그 흔적들은 정말이지 소변이 아니라 물이 내려갈 때 튀는 것들입니다...ㅠㅠ 변기 물을 내리면 꽤나 요란하게 "쿠오아아앙!" 하며 내려가는데 그러다 보면 정말 물방울들이 튄답니다! 그건 오해예요! 그리고 코 고는 건... 더 노력해야지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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