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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Jan 23. 2019

신혼, 우리 사이의 '미세조정' 시간

우리 정신차리고 살자

우리 정신 차리고 살자.


처음으로 프랑스어 시험을 봤다. 필요한 등급보다 한 단계 낮은 시험이었지만 시험에 대한 감도 키울 겸 또 어차피 실력도 안되기 때문에 이번 시험을 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 레벨에 맞는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앞서 누차 이야기했지만 영어시험이니 대학원 진학이니 무엇보다 게으름 때문에 프랑스어 공부에 매진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코앞의 시험 덕분에 며칠이나마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겨울 내내 구름만 가득하던 하늘이 모처럼 파랬다.


역시 파리는 콧대가 높다. 같은 시험인데도 다른 지역에 비해 응시비가 월등히 비싸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 학생들은, 특히 한국인들은 파리 근교 도시인 후앙(Rouen)에서 많이 시험을 본다. 시험료도 싸고 왕복 기차값을 감안해도 파리보다 저렴하다. 또 말하기 시험을 당일에 치를 수 있고 시험 성적이 빨리 나온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에 반해 파리는 말하기 시험을 며칠 간격으로 따로 보고 시험 결과도 늦게 나오는 걸로 알고 있다. 이름값이 높으면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무튼 시험을 보러 후앙에 갔다. 전날부터 여권과 필기구, 시험 응시표를 준비했다. 기차 시간도 넉넉했다. 비록 내 프랑스어 실력은 미천할지언정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시험을 방해할 다른 변수는 없었다. 아니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시험 시작은 2시, 이미 한 시간 전에 고사장에 도착했다. 여유롭게 로비에 자리를 잡고 마지막 시험 준비를 했다. 쓰기 시험에 활용할 어구들을 복기하고 시험 양식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속도 가볍게 비우는 등 심기일전, 이제 시험만 보면 됐다.


시험 시작 30분을 앞두고 내 시험장을 확인했다. 시험 응시자가 많기 때문에 여러 고사장으로 나누어 시험을 봤다. 나 역시 내 고사장을 찾기 위해 각각 고사장 문밖에 적힌 응시자 명단을 확인했는데 어느 한 곳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 시험장이었다.



그런데 약간 이상했다. 그곳은 굉장히 작은 교실로 많아야 4명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응시생 리스트에도 4명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어딘가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응시생이 너무 많아서 이런 곳에서도 시험을 보나 보다" 싶었다. 그리고 나 외에 다른 3명의 사람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하며 시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2시가 되도록 시험관이 오질 않았다. 시간은 이미 2시 3분쯤. 다시 한번 등골이 싸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프랑스스런 체계 없음의 한 단면인가?!"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든 '싸데펑(ça dépend)' 즉, '케바케'인 경우가 많은 데다 앞서 시험을 본 아내로부터 "어쩔 때는 시험 시간이 지나도 시험지를 막바로 안 걷고 눈치껏 문제를 풀게 해주기도 하더라고. 그때그때 다른 거 같아"라는 마을 들어서인지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이제 2시 5분.


내가 왜 그랬을까...
이제 시험을 봐야 해서 그런데 자리 좀 비켜줄래?


시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오더니 갑자기 시험장에서 나가라고 했다. "응???? 2시 시험인데 왜 나가라는 거지????" 그래서 물었다. 그랬더니 그의 입에서 "울라라!"가 터져 나왔다. 알고 보니 이 시험장은 말하기 시험장이었다. 밖에 적힌 명단은 말하기 시험 응시자 명단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미 2시 시험은 시작됐다는 것이다...! "????? 뭐라고?????"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아니 패스하고 나발이고 우선 시험은 봐야 할 텐데?? 이렇게 집에 가야 하나?? 돌아가는 기차는 7시인데 5시간 동안 뭐하지?? 아니 것보다 아내한테 뭐라고 해야 하지????" 사람이 죽기 직전에 그동안의 삶이 마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진다던데 그 순간 내 눈앞에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그 시험관은 원래 내 고사장으로 안내해주었다. 듣기 첫 번째 문제가 진행 중이었다. 듣기 시험의 경우 듣기가 두 개 나오는데 그중 하나는 약 5~7분 정도로 총 두 번 들려준다. 내가 시험장에 들어갔을 때는 첫 번째 듣기의 절반 이상이 지나갔을 때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속으로는 "망했다! 망했다!"와 함께 시험장에 있는 다른 응시생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다른 영역도 아니고 찰나의 집중력이 고도로 요구되는 듣기 시험 한가운데 번잡스러운 상황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필이면 내 자리는 두 번째 줄 맨 앞, 다른 학생들을 해 집고 가야만 했다.


정말 여러모로 하얗게 불태운 시험이었다. 멘탈이 붕괴된 상태에서 치른 시험, 어떻게든 내 페이스 찾아 시험을 치르긴 했지만 마은 한편은 계속해서 쿵쿵 내려앉았다. 또 다른 취약 영역인 말하기 역시 무슨 소리를 했는지, 시험관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도 모른 채 지나갔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생했어! 근데...


시험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소상히 보고했다. 시험 망쳤다는 내 말에 아내는 으레 있는 '시험 후 증후군'으로 여기고는 "괜찮아! 고생했다! 생각보다 결과가 잘 나올 수도 있어!" 하며 응원했다. 하지만 고사장을 잘못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 아니 어떻게 고사장을 못 찾아갈 수가 있어... 정말... 에휴..."라며 "우리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살자"라며 한마디 했다.


결혼 이후, 그리고 바로 파리 유학을 온 뒤 의도치 않게 크고 작은 실망을 그녀에게 안겨주고는 한다. 어쩌면 8년의 연애기간보다 더 많은 빈도로 그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담배를 끊겠다며 여기저기 빌붙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들키기도 하고, 공부한다면서 딴짓하고, 브런치에 글을 쓰겠다면서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보기도 하고. 좀 더 크게는 앞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단계들을 마주함에 있어 "걱정 마. 할 수 있어!"라고 호언장담을 하고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아니 다른 일들이 있었잖아.."라며 핑계를 대기도 부지기수. 물론 시험을 예를 들어, 통과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을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고 할까. 그런 순간들이 생각보다 자주, 빈번하게 드러난다.


파리에 눈이 내렸다.


어쩌면 원래 너는 이런 사람인데, 아닌 척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어.


언제 한 번 아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름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그런 느낌을 주었기 때문일 거다. 그래, 아내 입장에서 아르바이트 끝내고 집에 들어왔는데 내가 침대에 빈둥거리며 아이패드를 붙잡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오겠지. 


결혼과 동시에, 그리고 각자의 개인적인 삶이 제한된 유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노출돼 있다. 그동안은 '롱디'로 혹은 아직은 각자의 공간이 있었기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 혹은 가릴 수 있었던 모습이 이제는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다. 거기서 우린 서로를 보고 다시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지금껏 보여준 적 없었던 서로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다시 미세조정을 해야 한다. 누군가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혹은 각자의 입장에 맞춰 한 발씩 물러 설 것인지.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나'를 만들어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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