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살이, 신혼 생활을 돌이켜 보며
파리에 온 지 10개월이 되었다. 남편이랑 같이 산 지도 10개월이 지났다.
2018년은 내게 제법 큰 변화가 있던 해였다.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회사원의 삶을 중단했다. 나는 이 새로움을 갈망했던 것 같다. 프랑스에 오고서 불편하고 낯선 상황들에 신경을 곤두세울 때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겪게 된 변화를 기꺼이 즐겼다.
대낮에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가. 아침 9시면 회사에 출근했을 시간인데 나는 세느강 조깅 후 빵을 사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잠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로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결혼식을 치르고서도 서울과 부산에 떨어져 지내다가, 파리에 와서는 언제나 남편과 함께였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한 사람이고,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귀찮고 무서운 것을 미루면 순순히 처리해주었다(?). 어딜 가든 어떤 시간이든 든든했다.
이곳에서의 사소하지만 낯선 경험 중 하나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었다. 파리의 지하철 안에서는 휴대폰 통신 연결이 안되는 때가 많다. 한국에서라면 으레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텐데, 인터넷이 안 되니 휴대폰에 특별히 볼 것도 없고, 하필 파리 지하철은 서울 지하철보다 실내 공간이 좁아서 사람들과 시선이 더 잘 부딪치고, 어색하지 않게 시선은 피해야겠는데 마땅히 시선둘 곳이 없어 지하철 노선도만 애꿎게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
이제는 이런 것들에 익숙해졌다. 책을 들고 다니며 지하철 안에서는 책을 읽게 됐고, 글자가 눈에 안들어오는 날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이어가며 시간을 잘 보낸다.
그러나, 익숙해지다 못해 무뎌진다. 고맙고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을 당연히 여긴다. 일을 하지 않는 대신 하고 있던 프랑스어 공부가 한창 재미있었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지겹게 느껴지는 때가 왔다. 아무런 의무도 급할 것도 없는 나의 하루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고, 곁에 항상 남편이 함께 하는 것에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무뎌짐에 가끔 놀란다.
이번주, 프랑스에서는 겨울 세일을 시작했다. 집 근처에 있는 쇼핑몰에 구경을 하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분명 나 혼자 가는 것이 쇼핑하기에 편한데도, 남편은 같이 가봤자 내 뒤를 따라다니며 포털 뉴스 검색을 하고 있을 것이 뻔한데도, 남편을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은 6일 후에 있을 프랑스어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 전 남편에게 시험 공부를 왜 열심히 하지 않냐며 조금 다그쳐놓고서, 오늘은 기어코 같이 쇼핑 가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남편이 알아서 거절을 했다.
'나 혼자 돌아다니는 거 원래 좋아했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쇼핑몰에 가는 길, 내게 너무 당연해져버린 남편의 동행을 새삼 소중히 생각해보게 됐다. 그러고 보면 남편 없이 혼자 운동하러 나갔을 때 유달리 조깅하는 재미가 별로 없었고, 나 혼자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은 그렇게 적적할 수가 없었다. 파리에서, 서로에게 충분히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있는 지금이 참 행복하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그의 코고는 소리. 오늘 새벽에도 잠을 깼다가, 혼자 자던 시간을 잠깐 떠올려봤다. 숙면하던 시절...
그래도 항상 따뜻한 네가 있어서, 손과 발을 곧잘 꾹꾹 눌러주고 등을 쓰다듬어주는 네가 옆에 누워 있어서 좋다. 계속, 무뎌지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