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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Sep 15. 2019

아폴로 눈병 2

합리주의자의 합리적인 일상

이제 마켇주인에게는 처음 느꼈던 당황스러움과 초조함, 그리고 미안한 감정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오라고?


"손님, 아무리 그래도 30원을 바꾸려고 택시를 타고 갔다 오는 건 좀... 아니면 다른 걸 하나 더 사시는 건 어떠신가요? 값은 따로 받지 않겠습니다. 아무거나 가져가셔요. 뭐가 됐든 다 30원이라고 생각하시고요."

"그건 저로서는 조금 난감하네요... 이미 필요한 건 다 샀는 데다가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가격이 30원인 물건은 없는 거 같고요."


J는 손목에 찬 검은 가죽띠로 둘러싸진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약간의 짜증이 배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늦어지기 때문인 듯했다.


"가격표는 그냥 가격표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냥 특별 할인 이벤트라고 생각하세요. 아 그래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오늘만 특별히 마지막 손님에게 특별 세일을 한다거나, 아니면 오늘 오픈 3주년 기념 이벤트를 하고 있다거나 그런 거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문제는 제가 이미 필요한 걸 다 샀기 때문에 더 살게 없다는 겁니다."

"아니 그럼 정말 택시를 타고 갔다 오라고요? 아무리 적게 나와도 왕복하면 몇 천원은 나올 텐데요? 그리고 당장 택시가 잡힐지 어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글세요,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네요. 그래도 전 30원을 더 돌려받아야 하지 않나요?"



이쯤에서 J가 왜 당장 30원을 돌려받으려고 하는 건지, 이런 상황에서 잔돈 30원을 고집하는 건 불편함의 최소화라는 그의 가치관에 안 맞는 거 아닐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J의 입장에서 어쨌든 자신이 돌려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한다는 짜증과 불편함이 무척 큰 데다, 조금 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마켇주인에게도 불필요한 부채의식을 남겨주고 싶지 않아서다. 마켇주인은 내일 J가 다시 가게에 들릴 때까지 30원을 돌려줘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것이다. 무려 24시간 가까이 쓸데없는 부채의식을 뿌리박고 내린다는 것. 물론 지금 당장 택시를 타고 돈을 바꿔와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지만 두 개의 선택지를 저울 위에 올려봤을 때 지금 당장 해결하는 게 훨씬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마켇주인은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석상 같은 J를 보며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솔직히 말해 매일 마감 직전에 와서 장을 보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매번 10만원짜리 수표로 계산하는 것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고객이라고, 때마다 오는 단골이라고 참고 넘어갔지만 이렇게까지 앞뒤가 막힌 사람인 줄은 몰랐다. 이제 마켇주인의 속에서는 불길처럼 솟아오르는 화가 제 마음대로 설치기 시작했다. 고작 작은 구멍가게를 한다고 나를 무시하는 건가? 자기는 매일 10만원짜리 수표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위세를 떠는 건가? 내 가방끈이 짧은 걸 눈치채고 깔보는 건가? 남편은 돈 벌 궁리는 안 하고 매일 술만 처마시고 다니는 걸 알고 더 설치는 건가? 등등. 이제 마켇주인이 갖고 있는 모든 콤플렉스가 전원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물론 J는 이 중 하나의 사실도 알지 못하지만 마켇주인에게 J는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척하는 돌팔이 점쟁이처럼 느껴졌다.


"이 보세요!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안 주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아니 그리고 설사 택시를 타고 갔다 온다고 칩시다. 그럼 당신 혼자 여기 두고 가라고요? 아무리 단골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서로 계산할 때만 인사하고 보는 사이인데 뭘 믿고 당신 혼자 여기 두고 갑니까?"

"오해를 하시고 계시는군요. 전 이 가게에 혼자 있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진즉 집에 있어야 할 시간이네요. 이 상황이 저로서도 난감합니다. 택시를 타시든 걸어갔다 오시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전 집에 가 있을 겁니다. 돈을 바꿔오실 때쯤 제가 받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미친놈아!"


화를 참지 못한 마켇주인은 계산대 위에 너질러 있던 동전들을 한데 주워 J를 향해 던졌다. 때 되면 떼를 지어 날아가는 철새 떼처럼 무리 지어 한 방향으로 향하던 동전뭉치들, 그중 하나가 J의 왼쪽 뺨을 스치며 상처를 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야! 30원어치 더 살게 없다고 했지? 어때 지금 얼굴에 상처가 났으니 밴드라도 하나 붙여야겠네?"


마켇주인은 서랍장에서 밴드를 하나 꺼내 아까와 똑같은 동작으로 J에게 던졌다.


"자! 여기 30원짜리 밴드! 이제 됐지? 잔돈은 니가 알아서 줍고 당장 꺼져!"


J는 오른손등으로 왼쪽 뺨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그리고 가메 바다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 위에 놓인 밴드를 주운 뒤 상처 위치에다 붙였다.


"이제 됐네요. 근데 동전들이 너무 여기저기 있어서 찾아보려고 시간이 좀 걸리겠군요. 또 혹시 없어졌으면 계산이 또..."

"돈이 안 맞으면 그만큼 또 다리뼈를 부러뜨리든 머리를 밀어버리든 할 테니까 니가 알아서 해!"


J는 허리 숙여 바닥에 떠어진 동전을 하나둘 주웠다. 가판대 밑으로 숨어 들어간 동전도 찾아냈다. 약 30분간 이어진 동전 수거 뒤 계산을 마친 그는 가게를 나왔다. 운이 좋았다.


가게를 나와 집으로 가려던 J는 자신의 옷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찾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 돈이 아니었다. 아마도 아까 마켇주인이 던졌던 동전 중 하나가 흘러들어 간 듯했다. 근데 문제는 그러면 계산이 안 맞다는 거다. 500원이 자기 수중에 더 들어온 셈이기 때문이다. 황급히 J는 몸을 돌려 가게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셔터문은 내려가 있었다. J는 굳게 닫힌 셔터를 두 주먹으로 두들기며 외쳤다.


"저기요! 500원을 더 주셨습니다. 어서 돌려받으세요!"


하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었다. 그는 계속 두들기고 소리를 질렀다. 지친 그는 셔터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혹시 주인이 500원을 더 준걸 깨닫고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게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렀고 그는 계속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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