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댕동
종소리가 울린다. 혼자 버스정류장으로 하교한다. 다른 학생들은 무리를 지어 하교하지만, 나는 혼자 걷는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친구들은 방과 후 축구를 하느라 늦게 하교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다. 내 친구들 대부분은 여자친구가 있다. 물론 나도 있다. 상상이지만. 나도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고백할 용기도,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친구들에게 여자친구 있는 남자로 여겨진다.
나는 과거 인스타그램 부계정을 만들었다. 아이디는 손혜원. 그냥 생각나는 아무 이쁜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내 이상형 얼굴을 AI로 만들어 편집해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했다. 팔로워도 샀다. 40명에 5000원. 적당하다. 본계정과 맞팔로우 한 뒤, 스토리로 연인인 척하면 된다. 친구들은 묻는다. "너 여자친구 생겼냐?" 관심받는 건 언제나 즐겁다. 맞다, 나는 이제 여자친구가 생겼다. 학교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혜원이는 다른 학교를 다니는 것으로 설정했다.
친구들은 내가 연애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혜원이와 함께 간 척 마라탕집을 혼자 간 뒤 반대편 의자 앞에 수저를 세팅한 뒤 사진을 찍고 스토리에 올렸다. 내가 혜원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했어야 했다.
부계정으로 본계정에 DM을 보내며 연인의 대화를 만들어서 스토리에 올리고, PC인스타에서 모바일 인스타로 전화를 걸어 연인의 통화를 만들어서도 스토리에 올렸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나는 몰입하게 됐다. AI이미지이지만, 혜원이는 정말 이뻤다.
그리고 바로 지금, 버스정류장에서 똑 닮은 여학생을 보고 말았다. 아니 닮은 게 아니다. 동일했다.
2
재빨리 등을 돌렸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분명히 혜원이와 얼굴이 똑같았다. 이 사람의 중학교 교복 명찰을 확인하고자 옆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슬쩍. 힐끔...!
"손혜원"
아...! 이게 무슨 일인가. 낯선이에게서 익숙함을 느끼는 괴리감이 마치 혈관에 캡사이신을 주입한 듯 후끈해 미쳐버릴 지경이다!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녀가 나를 보지 않도록. 하아. 이게 무슨 상황인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버스를 탈 준비를 하는데, 그 버스를 원래 안 타는데, 나는 학원에 가야 되는데,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되는데... 결국 버스카드를 찍는다.
그녀의 뒷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머리카락 몇 올이 의자뒤로 넘어왔다. 건드려 보고 싶었지만 참는다. 그녀는 에어팟을 끼고 있다. 귀를 뚫은 건가? 가방엔 열쇠고리가 있고 실내화 주머니를 팔에 걸고 있는데 손목엔 애플워치인가? 손이 작고 통통하고 피부는 희고 밝은데 폰으로는 뭘 보고 있는 거지? 잘 안 보이는데 좀만 더 가까이 갈까? 아 폰에 반사되어 비친 내 얼굴을 그녀가 보면? 아 일단 가만히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근데 뒤에서 본 얼굴에 그녀의 볼살이 귀엽게 통통하다. 근데 그녀의 머리카락 몇 올이 의자 뒤에 있는데 이걸 만져볼까? 아 만지는 건 좀 아니지 근데 귀에는 에어팟이 …
근데 번쩍! 그녀는 손들어 하차벨을 누른다. 깜짝 놀라서 식은땀이 픽 번진다. 아무것도 안 한 척 허공으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그녀가 내릴 때 따라 내릴까? 그래야 할까? 아 근데 이것은 스토킹일까? 나는 범죄자 스토커인가? 나는 중학교 3학년인데 특정 인간을 집착하는 정신 나간 스토커이며 미친 성추행 성폭력 범죄자새끼인 건가? 버스가 서서히 느려짐과 동시에 그녀가 일어난다. 그녀의 치마가 보인다. 그 너머엔 그녀의 엉덩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발에게 말을 걸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내릴까 말까? 이 씨발새끼들은 사람이 말하는데 대답이 없다. 야! 나는 망치로 발을 깨부수고 싶었다. 버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차마 그녀를 볼 수 없었고, 내 발만 보고 있었다.
나는 얼어붙은 발에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3
아. 나는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서 숨을 헐떡인다. 방금의 그녀는 어떤 존재인가. 손이 덜덜덜덜 떨린다. 부계정으로 지랄 떠는 리플리 증후군인 나에게 신이 준 선물이었나? 내가 이 기회를 버린 건가? 아니면 내게 가상 인물을 실제로 존재하게 하는 초능력이 있는 것인가? 내가 명찰을 잘못 본 것인가—아니! 그건 절대 아니었다. 내가 얼굴을 잘못 아니! 그 얼굴은 확실히 손혜원이었다.
그녀는 나를 알까? 내가 버스정류장에서 힐끔 쳐다볼 때 그녀는 나를 못 봤다. 그녀가 버스에서 내릴 때 난 발만 보고 있었기에 내 뒤통수를 그녀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뒤통수만 보고도 나를 알아볼 사이라면 내게 인사를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를 모른다는 건가?
생각해 보자. 그녀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하교시간이 얼추 비슷한 중학교일 테며, 우리 학교랑 가까운 중학교일 것이다. 그럼 답이 없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는 다른 중학교와 거리가 상당히 멀다. 나는 점점 미궁에 빠지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답이 나왔다. 더 이상 추리 할 수가 없다. 더 이상의 경우의 수가 없다. 모든 추리는 바로 이 문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것.
(카톡!)
'학원 안 오니?'
오후 5시 5분. 선생님은 고작 5분 기다리고 문자를 띡 보내쌓는다.
4
늦게 간 학원은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어찌어찌 마친 뒤 마신 밖 공기는 왠지 모르게 촉촉했다. 도착한 집 공기도 보통의 날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 어김없이 나는 부계정을 들어가 본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 있다.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손혜원 계정에서 내 계정으로 DM 보내고 스토리에 올렸다. 연인이니까 "내일 학교 마치고 보자, 사랑해" 정도였다.
다음날 학교에선 나의 연애 얘기가 친구들의 주된 대화 주제였다. 관심받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나는 쑥스러운척했다. 한편,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양심적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교시간이다. 나는 가방 메고 정문으로 나간다. 학교 바로 앞 매점이 보이는데, 손혜원이다! 그녀는 명백히 손혜원이었다. 어제 봤던 그 얼굴, 비슷한 체격, 분위기...
큰일 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주변에는 친구들이 있다. 얘네들한테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아 내가 어제 보낸 DM이 실제로 이루어 진건가? 확실히 손혜원인 그녀는 폰을 보고 있다. 그녀가 고개를 들려나? 들었다! 나를 보고 손을 번쩍! ??? 발을 콩콩 구른 후, 총총걸음으로 내게 와서 "정빈아!" 팔짱을 낀다. 어??? 진짜로??? 일단 안녕 혜원아;; 친구들은 "오~ 정빈이 여자친구~" 라며 떠든다. 이 타이밍에 친구들에게 수줍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어쨌든 지금 이 상황은 내 계산에 없었다. 얘가 진짜 내 여자친구라고? 오른팔에 팔짱을 낀 키 작은 얘가? 얼굴이 이렇게 귀엽고 이쁜 얘가? 날이 좀 추워지는지라 숏패딩을 입은 그녀의 포근한 팔짱이 나를 감싸고 그녀의 뽀송한 피부와 말랑한 살이 느껴지고 나를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지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이다.
혜원이는 나를 봐왔겠지만, 나는 초면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얘는 또 나를 끌고 어딜 가는 건가? 나도 다른 차원으로 가는 건가? 나는 입을 열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최대한 자연스럽게 뱉은 말이었다.
"너랑 저번에 먹었던 마라탕 먹으러 간다고 했잖아 "
"아 그렇구나" 얘는 대화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건가? 그렇다면 어제의 일로 말을 시작해 볼까?
"혜원아 최근에 우리 언제 만났지?"
"우리 처음 만난 거잖아. 킥킥"
5
...
나는 숨이 턱 막혔다. 혜원의 눈빛은 긴장한 나와 달리 놀랍도록 선명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처음... 만난 거야...?"
"응 처음이지 으흐흐"
그녀가 대답했다. 내 옆의 혜원은 놀랍도록 내 머릿속 혜원과 성격이 똑같았다. 내 허상이 실제가 된 것이 아니라, 마치 내 상상 속 차원의 사람이 현실에 어느 순간 와있는 것이었다. 마치 이때까지 다른 서버에 있던 것처럼. 그럼 일단 물어봐야 할 것들이 몇 있다.
"아... 혹시 너 학교 어디라 했지?"
"없지 너가 설정 안 해줬잖아 히히"
".....?"
마치 아무 문제의식도 못 느끼는 듯 한 혜원에게서 다소 두려운 느낌도 있었지만, 새로운 경험에 설레기도 하다. 얘는 그냥 상상 속에서 나랑 놀다가 실제 세계에 왔을 뿐이다.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잠시 접어 두고, 나도 그렇게 대해줘야 할 것이다.
"정빈아 어때 맛있지?"
"어 완전 딱 좋아"
나는 이 상황에 완전히 흡수되기로 했다. 마치 마라탕국물을 흡수한 이 유부처럼. 좀 이상하지만 뭐 어떤가. 결국 좋은 거 아니야? 아, 어제 버스에서의 일을 말해볼까?
"혜원아 어제 너 엔디오 빌딩 앞 버스정류장에 있었어?"
"어! 뭐야? 어떻게 알아?! 오후 4시 49분 13초에 타서 오후 5시 1분 50초에 내렸어"
"...? 아... 그냥 좀 닮은 사람 본 거 같았거든. 진짜 너였네. 인사했어야 했는데"
"어제는 인사해도 아마 못 알아봤을 거야. 로딩이 덜됐었거든"
"... ㄹ.. 로딩이... ㅇ.. 아무래도 그렇지..."
나는 그녀가 무슨 메커니즘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녀가 낯섦을 왜 안느끼는지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들은 내게 있어 이젠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선 나는 혜원이와 행복하게 연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좋으면 그만 아닌가? 나쁜 거 없잖아. 뭐 어때. 그녀가 어디에서 왔든, 이제 별 관심이 없어진 것이다.
6
"오늘 진짜 재밌었어!"
"응 혜원아, 벌써 11시네, 조심히 들어가(어디로?) 수고했어."
"웅 내일 보자!!!"
그녀가 집이 어딘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혜원을 보며 묘한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본다.
도착한 집에서는 어김없이 DM창을 확인했다. 아. 역시... 있을 줄 알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다.
'정빈! 집에 잘 도착했어?? 벌써 보고 싶네 ㅋㅋ'
'ㅇㅇ 혜원아 나도 벌써 보고 싶다 ㅋㅋ 내일은 뭐 할까?'
'너 노래방 가고 싶다며 아! 그리고 내일 50일인 거 알지? 기대해 줘 ㅋㅋ'
'알지 알지(몰랐는데...)ㅋㅋ 너도 기대행'
아까 버스 탄 시간 말할 때부터 생각한 건데, 아무래도 데이터세계에서 온 애라 그런지 시간계산은 정확하다. 내일 50일이니까 만날 때 꽃집에서 꽃 사가야겠다.
나는 49일 만에 비로소 그녀와 DM을 한 셈이었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감각. 오늘 채팅내역을 스토리에 올리려다 급 망설여진다. 오늘은 안 올리기로 했다. 이건 더 이상 보여주기식 연애가 아니니까.
…
"헉! 이게 뭐야? 꽃다발??! 완전 이뻐!"
그녀가 좋아하니까 기분이 좋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내가 온전히 책임지고 싶은 사람이다. 우연히 생성된 그녀는 애초부터 오로지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존재였으므로 이 행복은 나에게 딱 맞다. 누구도 이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정빈. 가자! 노래방으로"
"그러자. 라이트 코인 노래방 맞지?"
"웅 ㅋㅋ 노래방도 진짜 재밌겠다. 너 노래 잘하잖아"
"뭐... 좀 하지 흐흐"
7
"정빈. 마지막 노래도 너무 좋았어. 이제 우리 갈까?"
"그래 재미있었다 히히"
"우리 밥 먹자 이제!"
…
"밥도 먹었겠다, 오늘은 이까지만 놀자. 해 지는데, 바래다줄까?"
"응 정빈... 으흐흐 골목까지만 같이 가주라"
골목은 다소 따뜻한 느낌이었다.
"여기서 딱 헤어지면 되겠네. 너네 집 저쪽이잖아."
"그래 혜원아 오늘도 좋았어."
"아, 잠깐... 이거..."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케이스 두 개를 꺼낸다. 하나를 열자, 반지가 나온다. 본인의 약지 손가락에 착용한다. 다른 케이스를 연다. 반지를 꺼냈다. 그녀는 나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호흡과 땀, 온기와 떨림이 느껴진다. 그녀의 긴장은 마치 렉 걸린듯한 느낌이다. 내 약지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려 하다가. 반지를 떨구고 만다. 내가 반지를 주웠다.
이건 반지다.
반지… 말이 참 곱다. 반질반질한 원고리의 비어있는 중앙을 채울 때, 내 피부가, 내 털, 혈관이 인지한다. 경험한다. 감각한다. 반지를 꼈구나… 반지는 손가락을 끼우기 위해서 중앙을 비운 것… 그렇지…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잃어야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지… 아… 나는 무언가를 잃은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적이 없네. 그러면 나는 중앙이 안 뚫린… 아!
!!!
그녀가 갑자기 없다. 두리번거려도 이곳엔 나 혼자 뿐이다. 반지가 빛나지 않는다. 뭐지?
"식후 30분입니다. 빨리 드셔야 해요"
이건 약이다.
중앙은 채워져 버렸다.
그리고 여기는.
어이 간호사. 다시 와보시오 여기 어디오
아... 그리고 손에 원...
약 하나 더 주시오.
그래 어쩐지 말이 안 됐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