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도 돼

산타가 있든 없든 간에

by 박상환

바야흐로 성탄절 시즌이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흥겹게 퍼진다. 아니 퍼졌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엔 길거리에서 캐럴을 듣기가 쉽지 않다. 저작권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항상 이맘때쯤 거리를 가득 메웠던 캐럴들은 이제는 검색과 다운로드라는 수고를 더해야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귀차니즘은 동심으로 가는 길을 더 멀게 만들었다.


여러 멜로디와 가사들이 생각난다. 창밖을 보니 흰 눈이 내리고 그 사이로 썰매를 타며 뛰놀던 아이들. 실버벨 소리와 라파파파 작은 북소리도 생생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탄일종 소리도 기억난다. 어둠이 고요하게 깔린 거룩한 밤에는 노엘 노엘을 흥얼거렸지. 그리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머리맡에 양말을 걸어두었다. 그리고 이 날 만큼은 절대 눈물을 흘리면 안되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그랬다. 우는 아이에겐 선물은커녕 국물도 없다고.


한낮 노래 가사뿐인데 그땐 왜 그렇게 잘 따랐을까. 그렇게라도 해서 꼭 선물을 받고 싶어서였을까. 노래 가사는 원래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이지만, 어린 나에게는 국물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단호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 산타 할아버지는 나에게 매우 인색한 노인네 같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거 애기들이 좀 울 수도 있지, 선물 하나 가지고 너무 하네"라고 생각했었다면 지나치게 성숙했던 것일까. 아무튼 '울면 안 돼'는 내 인생 최악의 캐럴송으로 남아있다.



산타를 믿지 않게 된 후에도 눈물을 쉽게 보일 순 없었다. 운다는 것.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곧 '약함'을 의미했다. 특히 남자들에겐 이 기준이 더 가혹했다. 학창 시절 어쩌다가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약골의 이미지가 주홍글씨처럼 낙인이 되었다. 소문은 전교로 퍼져나갔고 하루아침에 놀림거리가 되었다. 위로는커녕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마저도 귀여운 친구들끼리의 장난이었지만, 놀림당하는 사람은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학교 다니다 보면 친구들끼리도 종종 주먹다짐을 할 때가 있는데 이 때도 먼저 우는 사람이 패자가 되는 식으로 승패가 정해졌다. 우리 삶에서 울음은 철저히 나쁜 역할만 하고 있었다.


유명한 말 중에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라는 말이 있다. 어디서 어떤 연유로 만들어진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가혹한 말이다. 1년도 아니고, 10년도 아니고, 평생이라니.




마음껏 울 수 없는 것은 비록 남자의 경우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성별을 막론하고 우리는 어려서부터 눈물을 억압하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울면 안 돼'는 비단 산타 할아버지의 얘기만은 아니다. 어렸을 때는 울음을 미끼 삼아 당근과 채찍을 주었던 어른들의 계략에. 학창 시절엔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지지 않기 위해서. 그 외 다른 저마다의 이유로 눈물을 참고 슬픔을 꾹 눌렀던 날들이 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은,



어른이 된 후에도 자유롭게 울 수는 없었다. 각자 상황은 달라도 눈물이 나려고 할 때면 계속 주변을 의식하게 됐다. 남들 보기에 창피해서, 쪽팔려서. 아니면 혹시나 가족들이 볼까 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몸은 커졌지만 마음은 아직 어리다. 내 마음대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도 울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감정을 숨긴 채 살고 있다. 아직도 눈물을 보이면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할까 봐, 누군가에게 약하게 보일까 봐 그렇게 꾸욱 꾸욱 삼키고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


맘껏 울어라. 슬픔이 다할 때까지.


뭐든지 참으면 병이 된다고 했던가. 울음도 마찬가지다. 꾹꾹 눌러 삼킨 눈물은 내 안으로 파고들어 호수를 만든다. 그 호수는 참으면 참을수록 커진다. 계속 커지다 보면 결국 영혼을 잠식하게 되고 마음의 병을 얻게 된다. 마음속 눈물의 호수에 익사하게 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호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아니 아예 호수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이 울음을 인정하고 표현해야 한다. 애써 부인하고 참고 억눌러봐야 좋을 것이 없다. 자기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는 꼴이다. 남들이 뭐라 해도 상관없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된다. 아니 억지로 웃지 말자. 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든 마음껏 울고 눈물을 흘리자. 우리의 슬픔은 우리의 기쁨만큼이나 소중하다.




우는 만큼 마음은 더 깊어진다. 슬픔이 쌓인 만큼 눈물을 토해내면 마음속의 그만큼의 빈자리가 생긴다. 그제야 온갖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것들이 그 속에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또 슬픔이 쌓일 때가 올 것이고 그러면 또 비워내면 된다. 이렇듯 삶이란 이러한 비움과 채움의 반복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결국 더 나은 사람이 된다.


눈물의 양만큼 비워진 자리엔 이해와 공감의 싹이 자라난다. 맘껏 울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마음들은 같이 울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우리의 울음이 결국 돌고 돌아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 울음을 더 이상 부정하지 말자. 울음은 기쁨과 웃음만큼이나 소중하다.


울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울어도 된다. 산타가 있든 없든 간에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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