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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Jan 25. 2020

<해치지 않아>

동물원의 탈을 쓴 세상

최근 극장가에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비슷한 느낌의 영화들이 연달아 개봉했다. 동물을 소재로 한 <닥터 두리틀>, <해치지 않아>, <미스터 주>가 그 주인공이다. 동물과 대화를 한다는 설정의 <닥터 두리틀>과 <미스터 주>가 한 핏줄이라면, <해치지 않아>는 두 작품과는 내용적으로 확실히 다른 영화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해치지 않아>는 동물의 탈을 쓰고 연기하는 인간들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말 같지도 않은 이런 황당한 설정이라니. 처음에는 아예 볼 생각도 없던 영화였다. 그런데 예고편에서 보인 뜬금없는 유머 코드가 내심 궁금함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해치지 않아>는 손재곤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누군가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는 <달콤, 살벌한 여인>과 <이층의 악당>을 만들었던 감독이다. 그가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코미디 감각은 한국영화의 코미디 장르 안에서도 확실히 다른 영역에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독특함과 신선함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이층의 악당>의 흥행 부진 때문인지 한동안 그가 만든 작품을 볼 수가 없었다. 10년 만에 돌아온 그가 선택한 소재는 그에게 굉장히 잘 맞아 보였다.


유머감각은 여전하다. 작년에 개봉한 <극한직업>처럼 빵빵 터지진 않지만, 상황에 걸맞게 적절한 곳에서 적절하게 터지고 있다. 그러나 유머의 총량이 기대치보다 밑도는 부분도 있다. 감독의 이전작들에 비해 드라마가 코미디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원작의 많은 내용을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담기 위한 고심의 결과라 생각된다. 동물원을 지키려는 동물원 직원들의 고군분투. 이 애잔하고도 귀여운 드라마가 감독 특유의 코미디 감각과 적절히 배합되어있다. 유머의 총량이 적다고 해도 간간히 나오는 유머의 세기는 결코 작지 않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복귀라고 생각한다.



직원들이 동물의 탈을 쓰고 연기하는 동안, 동물원 밖에서는 인간의 탈을 쓴 동물들이 이들을 잡아먹으려 혈안이다. 악덕 대기업, 돈밖에 모르는 법조인, 바람둥이 사기꾼 자영업자. 다들 먹잇감을 쫓는 본능에만 충실한 동물들처럼 느껴진다. 구성상 악역을 맡게 되는 이들의 캐릭터가 다소 뻔하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코미디 장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더 깊고 복잡한 설정은 자칫 불필요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동물원의 직원들은 동물원을 살려야만 한다. 새로 부임한 원장 강태수 (안재홍)와 직원들은 하루 종일 동물의 탈을 쓰고 같은 자세로 앉아 있거나 나무메 매달려 있거나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동물원의 설립자 서원장 (박영규), 수의사 한소원 (강소라), 그리고 두 명의 직원 건욱 (김성오)과 해경 (전여빈). 이들의 노력이 은근히 마음을 때린다. 다 쓰러져 가는 동물원을 살려보겠다고 새로 온 원장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묵묵히 따르는 직원들. 동물원에 대한 그 순수한 마음이 묘하게 코끝을 건드린다. 영화 속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 중에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동물의 탈을 쓴 사람들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 외의 인물들은 심각하게 비인간적으로 그려진다. 그러한 비인간성이 계속 인간성을 해친다.


동물들은 해치지 않는다. 해치는 건 결국 사람들이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점은 강태수 원장 역을 맡은 주연배우 안재홍이다. 엄청난 호연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 자기가 맡은 역할을 아주 톡톡히 잘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멀티캐스팅의 서브 캐릭터나 주인공 친구 같은 전형적인 '조연'의 이미지가 강했었다. 하지만 <해치지 않아>에서는 가장 많은 분량을 소화하면서 극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다. 이러한 멀티 캐스팅에서는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배우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 역할을 안재홍이 하고 있다. 그리고 의외로 희비(喜悲)의 양면을 동시에 표현할 줄 아는 탁월한 연기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이 배우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해치지 않아>는 어떻게 보면 매우 유치한 영화다. 동시에 매우 친절한 영화다. 쉽고 단순한 구성. 간간히 터지는 웃음. 적당량의 교훈. 캐릭터의 매력. 이 모든 걸 계량기로 잰 듯 적절하게 섞어 놓았다.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무색무취한 영화가 될 수 도 있다. 나는 매우 친절한 영화라 생각한다. 오히려 너무 친절하고 착하기만 한 게 이 영화의 흠이라면 흠이다. 결국 아무도 해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이 영화를 이렇게나 순진하게 만들었나 보다.


<해치지 않아>는 제목처럼 착하고 친절하다. 하지만 왜 그럴 때가 있지 않나. 가끔씩 강하고 자극적인 게 끌릴 때. 충분히 좋은 영화지만 뭔가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바로 그거다. '약간의 자극' 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러한 마음을 담아 손재곤 감독님의 다음 행보를 기대해본다.



ps: 이건 왠지 아이들과 보면 더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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