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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Feb 25. 2020

<1917>

강박에 가까운 롱테이크

4년이 넘는 전쟁 기간 중 1박 2일만 딱 잘라 영화를 만든다면 과연 어떤 내용의 영화가 될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피 튀기는 전투. 군 수뇌부들 간의 치열한 두뇌싸움. 전장에서 피어난 불꽃같은 사랑. 아니면 휴머니즘을 강조한 대서사시.


<1917> 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영화다. 세계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1917>은  전투가 아닌 '전달'에 대한 이야기다. 공격명령을 취소하기 위해, 그 취소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두 명의 병사는 아무런 지원도 없이 14km를 걸어가야 한다. 적군에 의해 통신도 두절된 상태, 전장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길에 믿을 수 있는 건 옆에 있는 동료뿐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그들의 발자국은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생경한 영화적 체험을 주고 있다.




<1917> 은 매우 독특한 구성의 영화다. 아니, 놀랍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얘기하듯이 <1917> 이 거둔 기술적 성취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하나의 테이크처럼 느껴지는 촬영과 편집은 현재 할리우드의 기술력 그 정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1917> 은 스케일이 큰 전투씬이나 물량공세는 없지만, 놀라운 기술력을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절대적으로 큰 화면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물론 당연히 이 2시간짜리 영화가 하나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지진 않았겠지만, 촬영과 편집을 통해 이루어낸 119분의 롱테이크는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다.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는 2시간 동안 집요하게 인물의 동선을 따라간다. 인물이 걸을 땐 같이 걷고, 쓰러질 땐 같이 쓰러지고, 뛸 때는 같이 뛴다. 인물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면밀하게 비추며 관객과 스크린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스토킹 하듯 인물과 그 주변을 따라다닌 카메라는 영화 <1917>을 감상보다는 체험에 가깝게 하고 있다. 역시 그는 현존하는 최고의 촬영감독임이 틀림없다.



이에 더하여 토마스 뉴먼이 만들어내는 사운드도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목숨을 걸고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 병사들의 여정은 부비트랩이 터지고, 적군의 칼에 일격을 당하고, 독일군과 육탄전을 벌이는 등 전달을 위한 길이 결코 순탄하지 만은 않다. 극의 긴장감을 형성하는 이 위기의 순간들에 카메라는 더욱 역동적이 되고, 시의적절하게 토마스 뉴먼의 음악이 긴장감을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1917> 속의 음악은 마치 공포영화나 스릴러의 그것처럼 서서히 들어왔다가 일순간에 폭발한다. <죠스>의 배경음악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촬영, 편집, 음악의 3박자는 이 영화가 유례없는 기술적 성취를 거두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흔한 전투씬 하나 없이 오직 달리고 걷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1917>은 어쩌면 현재 할리우드 기술력의 최전선에 있는 듯하다. 장인들의 솜씨가 어우러진 이 영화는 확실히 고품질이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빚어낸 이 작품만의 퀄리티는 놀라움 그 자체다. 어떤 말로도 형용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뛰어난 기술적 성취를 걷어내는 순간 이 영화는 급작스럽게 평범해진다. 사실 명령을 전달하러 간다는 단순한 내러티브는 그 어떤 극적인 반전을 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병사들의 걸음을 따라 보이는 전쟁의 참상들은 나름 장르의 미덕을 살리고 있지만, 이전에 나왔던 전쟁영화에 비해 도드라져 보이진 않는다. 두 병사간의 우정이라든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념을 표현한 부분도 흔한 전쟁 드라마의 클리셰에 지나지 않는다. 빈약한 서사와 대비되는 놀라운 기술력은 오히려 강박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초반부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던 기술력은 후반부로 갈수록 다른 의미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반복되는 롱테이크는 지루함과 졸음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꽤 우수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한 놀라운 기술적 성취를 이루어 냈으며, 그 위로 뻔하지만 대중적인 드라마를 얹음으로써 나름의 작품적 성취도 획득하고 있다. <1917> 은 완벽하진 않더라도 꼭 한 번은 봐야 할 전쟁영화 임에는 틀림이 없다.


<1917>은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입증이라도 하듯 여러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수상 레이스의 마지막 피날레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에게 그 영광을 빼앗기고 말았다. <1917>을 보고 난 후 더욱 여실히 느꼈다. 아카데미의 선택이 100번 옳았다는 것을.



ps: 꼭 IMAX 상영관에서 보세요. 어쨌든 될 수 있는 한 큰 화면에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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