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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Jan 27. 2020

10.26 사건과 영화 <남산의 부장들>

충성이 총성이 되기까지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린다. 이 몇 발의 총소리는 18년간 이어진 독재의 마침표를 찍는다. 총성의 주인 김재규는 최후 진술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고 얘기했다. 김재규의 평가는 현재도 계속 엇갈리고 있다. 대통령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가히 충격적이다. 동시에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0.26 사건은 새로운 군부독재가 탄생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마치 흑백 TV에서 칼라 TV로 넘어가듯 정치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것이 우발적 범행이었는지 계획적 거사였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느 쪽이 되었든 역사적으로 봤을 때 초대형 사건임이 분명하다. 이 결과 김재규를 포함한 중앙정보부 대원 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발단을 오로지 김재규만의 배신과 결심으로만 얘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한 명이지만, 이미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예고하는 전조 현상들이 국내외에서 발발하고 있었다. 유신독재의 썩은 부위가 곪을 대로 곪아서 터지기 직전이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처럼 위태로운 정국의 1979년이었다.


코리아 게이트와 김형욱 : 영원한 비밀은 없다

제4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


197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에 대대적인 기사가 실린다. 한국이 미국의 국회의원들과 공직자들에게 수십만 달러의 현금을 포함한 뇌물을 제공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이것이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다.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진행된 이 공작은 1970년대 들어 매년 진행이 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때마침 당선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해 강경한 대응과 대대적인 수사를 지시했다. 한미관계는 악화되었고, 주한미군 철수 같은 외교적 압박도 가해졌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의 인권유린에 대한 전말이 드러나고 미국은 이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1979년 한미 정상회담을 빌미로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 문제 및 내정 간섭에 대해 강하게 토로하였고, 지미 카터는 매우 화가 났었다고 한다.


김형욱은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사람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중앙정보부의 악한 이미지는 대부분 김형욱 부장 시절에 생긴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표적인 충신이었던 그는 하루아침에 중앙정보부 부장 자리에서 경질된다. 쉽게 말해 잘린 것이다. 토사구팽 당한 이후 망명생활을 하던 그는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음지를 양지로 끌어올렸다. 경질 이후로 쌓인 박정희 정권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이 시초였다.  김형욱은 1977년 6월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정희 정권을 고발하기에 이른다. 이는 코리아 게이트 사건과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부패가 미국 정계에도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김형욱은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다.



YH 사건과 신민당 :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농성 투쟁 중인 YH무역의 여공들


후에 YH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YH무역이라는 한 가발공장에 대한 이야기다. YH무역은 1966년에 창업한 회사다.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회사는 크게 성장했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은 열악했다. 지나친 저임금과 불법해고, 부당 전출 및 감봉 등의 행위를 자행했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결국 노조를 결성하게 만들었다. 노조는 회사 측과 수차례 협상을 진행하였고, 나름 소소한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경영이 악화되자 회사는 일방적인 폐업 결정으로 사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게 된다. 1979년 8월 6일의 일이었다. 노조는 이에 반발하여 농성에 돌입한다. 하지만 회사 안의 공간은 이미 회사가 다 차단한 상태였다. 이에 노조는 당시 야당인 신민당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이들의 호소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신민당 당사를 내주고 그 자리에서 YH무역 여공들의 농성이 시작된다. 이들의 농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됐고, 급기야 여공 중 한 명이 사망하기에 이른다. 1979년 8월 9일 농성 시작. 8월 11일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에 있어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김영삼 총재는 1979년 9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 직접적인 개입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결국 총재직에서 그를 제명하고 만다. 이를 두고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이 의견 대립을 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차지철의 말에 힘을 실어준다. 이때가 1979년 10월 4일이었다. 김영삼은 제명 이후 아주 유명한 말을 남긴다.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터지기 직전의 화산은 부산으로 옮겨지게 된다.


부마 항쟁 : 들끓는 민심

'부산에 비상 계엄'

부마 항쟁.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항쟁이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일어난 항쟁으로 박정희 정권에 몰락을 가져온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YH무역 사건으로 유신 정권 심판에 불씨가 일어나고, 부마항쟁이 그 불씨에 기름을 붓고, 마지막으로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1972년 유신체제 선언 이후로 크고 작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이 있었다. 무력으로 찍어 누르던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들어오면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시민운동, 학생운동에 대한 찬성 여론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2차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지고 물가가 상승함에 따라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민심 또한 악화되고 있었다. 특히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던 부산-마산 지역의 민심은 더욱 크게 요동쳐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시민들도 큰 보탬을 주었다.


10월 15일 부산대학교를 중심으로 항쟁은 시작되었다. 민주 선언문이 반포되었고 학생들은 일제히 집결하였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2,0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시위의 불길은 부산을 넘어 마산까지 번졌다.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시위에 도움을 주는 한편, 적극적으로 시위대에 가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마 항쟁은 4.19 혁명 이후 최초의 민주항쟁으로 유신정권의 몰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사건의 진위 파악을 위해 부산을 방문한다. 부산 지역의 소요를 보고 온 김재규는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서울도 위험에 처할 것이라 생각했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경보다는 회유와 대화로서의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의 생각은 달랐다.

박정희 대통령 (위)과 차지철 (아래)의 대화

이 말을 들은 김재규는 '내가 끝내야겠다' 고 이때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유신정권의 종말은 한 사람에 의해서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 사람이 총대를 메고 방아쇠를 당기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의 열망이 일련의 사건들을 만들어 냈고, 여러 면에서 쇠약해졌던 권력에 총구를 겨누게 한 것이다.


김재규의 결심 : 차지철과의 대립

차지철 경호실장 (좌)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우)

차지철은 10.26 사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다. 사건 당일 김재규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유신정권 말기 각각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권력의 양 날개에 있었다. 유신 말기에 사사건건 부딪히는 모습이 여러 기록과 증언을 통해 남아있다. 1979년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차지철은 강경대응을 김재규는 온건한 방법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매번 차지철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에 김재규는 개인적인 원망과 서운함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둘의 대립이 단순히 몇 개월 사이에 벌어진 일은 아니다.


김재규는 군 시절 계급도 낮고 자기보다 8살이나 어린 차지철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이 내내 맘에 안 들었을 것이다. 이 당시 차지철의 과격한 행실은 워낙에 유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10.26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 전 정부 관료들은 김재규가 아닌 차지철이 범인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차지철은 육사 출신이 아니다 보니 육사 출신에게 열등감을 느껴 경호실장이 된 이후로 정부 고위 관료들을 하대하고 무례하게 대했는데 김재규도 이에 포함됐다. 또한 직위를 이용한 월권 행사도 서슴지 않아 김재규와 차지철은 시시각각 날이 선 대화를 주고받았다. 충성을 바쳤던 박정희 대통령마저 차지철 쪽으로 기울자 김재규는 점차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10.26 사건이 우발적이었는지 계획적이었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차지철과의 대립과 박정희 대통령의 차지철에 대한 신임이 김재규의 심리에 어떤 변화를 주었음은 분명하다. 10.26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개인의 변화가 맞물려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다를 뿐 99%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 (곽도원)의 연설하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코리아 게이트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사건을 크게 부각하여 다루지는 않는다. 중앙정보부장 김규평 (이병헌),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 (곽도원), 경호실장 곽상천 (이희준)등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거사가 있기까지 영화 속에서 나오는 가장 큰 사건은 이 영화의 유일한 허구일 수 있는 박용각 납치살인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도 크게 보면 김규평과 곽상천 두 인물 간의 대립에 대한 이야기다. 10.26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있었던 사건들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잠깐 등장하거나, 아주 최소한의 숏만 할애받고 있다. 사건은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필요한 만큼만 보이고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이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배우들의 몫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배우들은 매우 엄청난 퍼포먼스를 펼쳐 보이고 있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뛰어난 연기를 모든 배우들이 동일하게 해내고 있다. 위에 언급한 세 배우들 말고도 박 대통령을 연기한 이성민 배우나 로비스트 데보라 심을 연기한 김소진 배우까지 연기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한치의 빈틈도 없다. 이 부분이 <남산의 부장들> 이 이룬 영화적 쾌거다.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고, 동명의 소설도 있다 보니 이 영화가 특별히 어떤 깊이 있는 주제를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사건의 흐름대로 무난하게 쫓아간 연출은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연기자들의 연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굉장히 성공적인 전략이었다. 또한, 그 시절의 분위기를 자아내고자 미장센과 프로덕션에 상당한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남산의 부장들> 미술팀은 이 영화의 배우들만큼이나 일등공신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은 10.26 사건 이전의 몇 달간을 권력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은 중심으로 그려 나간다. 그 몇 달간을 재구성하는 솜씨가 꽤나 멋지다. 이미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이야기인데도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마약왕>으로 주춤했던 우민호 감독은 <남산의 부장들>로 다시 한번 그 실력을 입증하게 됐다. <남산의 부장들> 은 확실히 걸작이나 수작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게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화를 재구성 함에 있어 이렇게 정확하고 재밌게 만든 작품도 한국 영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토록 멋진 재구성이라니.


40년이 지나서 맞이하게 된 그날의 분위기. 이제는 우리 모두가 말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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