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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Feb 21. 2020

<사마에게>

외면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위대한 기록

사람들에겐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존재 자체가 삶의 이유이기에 때로는 죽음의 두려움마저 떨치게 한다.


몇 년째 내전이 끊이지 않는 시리아. 그 동쪽에 위치한 알레포라는 도시. 알레포는 시리아 내에서도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매일같이 죽음을 목도하면서도 이곳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며,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알레포의 모습을 '기록' 하려 하는 사람도 있다.



독재자 알아사드 정권에 대항하며 시작되었던 시리아 혁명은 이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상으로 악화되었다. 정부군의 무장 진압과 반군의 저항. 여러 이해관계가 맞물린 강대국의 참전으로 시리아 국토는 그야말로 황폐화되었다. 수천 명의 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저널리스트 와드는 대학교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할 때부터 기록과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알레포에 남아 전쟁의 참상을 마주하며 기록하고 있다. 와드는 오랜 친구인 의사 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 사마. 죽음이 일상이 된 공간에서 피어난 삶은 이 기록의 목적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다.


와드와 함자는 그들이 마주한 비극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수차례 피할 길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알레포에 남았고, 그들의 안위를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빗발치는 포탄과 비처럼 쏟아지는 유혈 속에서 그들은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도시, 이 곳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의사인 함자는 생명을 구하고 지키려 노력하고, 와드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카메라를 들었다.


사마가 태어난 순간 이 기록은 무엇(what)을 기록하는지를 뛰어넘어 왜(why) 기록하는지까지로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와드와 함자, 그리고 알레포의 모든 지키는 자들. 결국 누군가의 부모님이기도 한 그들이 왜 이렇게 목숨 걸고 싸우는지를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 숭고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와드의 카메라는 계속 꺼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전쟁을 응시하고 있다.



와드의 카메라는 전쟁의 참상을 대변이라도 하듯 거칠게 흔들린다. 그 어떤 꾸밈도 없이 날것 그대로의 영상이 눈앞에 전시된다. 카메라 안에는 울음과 비명이 있다. 무수한 죽음이 있다. 떠나는, 떠나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누구도 연기를 하고 있지 않지만 그 어떤 연기보다도 생생한 말과 행동들. 그들과 같이 먹고 자며 생활했던 와드이기에 장면 하나하나 매 순간순간이 매우 사실적이고도 진심 어리게 표현되고 있다. 전쟁의 불안, 죽음의 공포, 필사적인 구호, 삶에 대한 집념, 짧은 웃음과 긴 슬픔, 분노와 좌절. 와드는 이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저널리스트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그녀는 용기 있게 카메라를 들었다.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노력이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물인 것이다.


사실 <사마에게>는 보기에 굉장히 불편한 영화다. 전쟁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눈 넘김이 영 좋지가 않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그런 고상한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왜 싸우는지를 기록하려 했고, 그 기록은 <사마에게>라는 다큐멘터리를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들어 주었다. 다큐멘터리 필름 <사마에게>는 시리아 내전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준다라기 보다는 그냥 그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전쟁 최전선에 위치한 와드의 카메라는 극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리얼리티'를 그만의 방식으로 획득하고 있다.


또한 사마의 존재와 병원의 환자들, 이 둘의 묘한 대비. 이러한 삶과 죽음의 교집합이 일어나는 순간은 <사마에게>가 단순한 다큐멘터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죽음의 잡초만이 무성한 곳에 피어난 꽃 같은 생명. 이 꽃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헌신. 이러한 부분이 <사마에게>가 그저 참상과 고통만을 전시하는 것은 아님을 증명한다. 사마의 탄생과 존재는 이 다큐멘터리의 감정적/이성적 성취를 가져다준다. 사마가 울고 웃을 때 여러 가지 질문과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시리아 내전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시리아 난민 사태는 전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한때 난민 문제로 꽤나 시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사마에게>를 본 후 난민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장 정책적으로 봤을 때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난민 문제에 대해서 섣불리 판단하고 말하기는 어려워진다.


정치, 종교, 민족 문제로 시리아는 이미 화약고가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 안에서 목숨을 잃는 대다수는 전쟁의 목적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영화 속 사마는 살아남았지만 아직도 시리아에는 수많은 사마가 있다.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ps: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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