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예 웨스트 트럼프 지지 소동
칸예 웨스트의 트럼프 지지 소동이 소란스럽다. 트럼프를 형제라고 부르는가 하면 트럼프의 슬로건 "Make America Great Again"이 적힌 모자를 쓰고 인증샷을 올렸다. 트럼프 역시 칸예 웨스트의 러브레터에 공개적으로 응답했다. 이 소동은 블랙뮤직 커뮤니는 물론 그 너머로 즉각 구설수를 일으켰다.
'bro'라는 관용어와 크루 문화에서 알 수 있듯, 힙합은 플레이어들의 유대감이 끈끈한 장르다. 이는 크루라는 소집단 간의 대결 심리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 바닥 모든 사람이 경쟁자인 동시에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형제라는 의식을 빚어낸다. 미국 힙합 인사들이 "힙합이 변질됐다", "뿌리를 존중하라" "힙합은 단합해야 한다"처럼 주어 '우리'를 상정한 발언을 자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문화의 바탕은 힙합이 탄생한 배경, 차별 받는 흑인들의 공동체 게토에 있다. 때문에 힙합은 게토를 탈출하기 위한 자수성가의 음악인 한편, 백만장자 래퍼들이 기층 흑인들이 겪는 인종 차별에 대항하는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참여해온 것이다. 릴 웨인은 한국 래퍼들에게 '허슬'의 대명사처럼 존경 받는 래퍼지만, 그는 "나는 성공한 흑인이다. 중요한 건 내 인생이다."라고 BLM을 외면한 후 절친 티아이에게 실망스럽다는 장문의 공개편지를 받아야 했다. 릴 웨인과 칸예 웨스트는 대단한 음악적 성취를 이뤘다. 하지만 미국 힙합에서는 '우리'를 외면하는 구성원은 '리스펙' 받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우리'란 주어를 발화하는 래퍼가 잘 보이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들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는 이도 적고, 장르 신으로 범위를 좁혀도 플레이어들 사이 유대감이 풀어진 상태인 것 같다. 내 크루, 내 레이블 식구, 친분이 있는 래퍼끼리 챙기는 가족 의식이 발견될 따름이고, 그 이상의 연결고리는 드러나지 않는다. 한국에는 게토가 없다. 미국 흑인처럼 정체성 때문에 사회 구성원 전체가 차별 받지도 않는다. 미국 힙합 신의 뿌리는 장르적-사회적-물리적 공동체(게토)에 박혀 있다. 한국 힙합은 홍대 신이란 장르 공동체 외에는 어떠한 종류의 공동체를 공유해 본 적이 없고, 온라인 커뮤니티가 거점이 되어 마니아 의식이 공동체 의식을 대신했었다. 이제는 홍대 신이 사라졌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으로 래퍼들을 팔로우하는 다중의 팬덤 문화가 마니아 문화를 압도한다. 장르 신을 아우르는 공동체의 그물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한국 힙합이 미국 힙합처럼 끈끈한 형제애를 나누지 못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역시 게토에 비견할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흡사 게토에 살고 있는 것처럼 취하는 난폭한 제스쳐는 난무해 온 것을 떠올리면 이율배반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장르 문화를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경향은 그만큼 장르에 대한 이해가 편중돼있다는 뜻이다. 힙합은 '허슬'과 '스타팅 프롬 더 바텀'이요, 여성과 동성애자를 남자답게 모욕하는 음악일 뿐, 그 아래 깔린 문화적 바탕은 잘 거론되지 않았다. 이렇듯 장르 신을 묶어 줄 구심력도 없고, 장르 신 바깥을 향한 사회의식도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한국 힙합의 좌표를 설명해 주는 또 다른 실마리다. 장르 신 독과점에 신 전체가 동조했으며, 힙합을 사회와 동 떨어진 문화적 자치구로 오해하고, 장르의 클리셰를 분별없이 걸쳐 입는 '힙찔이'가 탄생했으며, 약자들의 연대의식은 누락한 채 약자들을 향한 혐오를 장르의 본령으로 학습한다. 그를 향한 비판에는 "힙합은 원래 이런 음악이다. 참견하지 마라. 아 돈 기버 퍽!"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미국 힙합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힙합 자체가 특수한 문화를 품은 장르다. 보수성과 약자 혐오 같은 함정을 품고 있을 뿐 더러, 앞서 말한 형제애도 실은 흑인 남성들의 형제애에 가깝다. 이 점들이 한국 실정에 따라 다른 차원으로 전개 되었다는 의견을 밝히는 것이다. 이 상황을 자각하고, 가급적 균형 있게 문화를 가꾸어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이다. 힙합은 풍부한 성질을 지닌 장르라서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자원 역시 품고 있다. 래퍼들이 물의를 일으킬 때 마다, 사람들은 "힙합은 저항의 음악인데 한국 힙합은 뿌리를 잊었구나" 개탄한다. 저항정신은 추상적인데다, 장르를 설명하고 정확한 교훈을 얻는 데 한계가 있는 어휘다. 나는 저 뜬구름 같은 말을 버리고, 장르 특유의 유대감을 공동체 의식이란 키워드로 추출해 객관화한 후 문제의식을 전환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한국 힙합은 물론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의 팔할 이상이 저 말을 성찰하는 데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