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 '88만 원 세대'와 함께 세대론이 등장한 지 십 년이 지났다. 세대론은 롱런하며 사회의 키워드가 됐다. 하지만 회자된 만큼 복기되진 않고 있다. 이 담론을 결산하는 기획이 절실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몇 마디 남긴다. 지난 십 년 간 청년 문제는 무수하게 언급됐지만, 정치세력은 젊은 세대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진보언론은 그들을 책임감 있는 주체로 호명하는 데 실패했다.
청년 고용난은 참여정부 시절부터 본격화됐다. 세대론은 젊은 세대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가리키며 나타났다. 지난 시간 동안 범 진보파는 젊은 세대를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의 혹은 기성세대가 누린 만큼 누리지 못하는 피해자라 불렀고 동정과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리며 포섭하려 했다. 젊은 세대는 좌절감과 자기 연민의 연장선에서 사회를 바라보게 되었다. 세대란 그릇은 세대로 구분되지 않는 계급 문제와 젠더 문제 같은 갈등을 담기 힘들다. 민주당과 진보 언론은 세대 간 대결구도를 조성하고 청년들의 고통을 특권화하며 세대론을 전개했다. 그릇의 한계를 보충할 수 없는 논조였다.
세대론은 민주당의 유권자 동원 전략으로 채택되며 정파적으로 쓰였다. 젊은 세대의 정치적 실천과 의무가 "민주당에 투표"하는 것으로 축소되고 강요되었다. 기성세대는 청년 세대에게 나쁜 사회를 물려준 죄의식의 고백과 청년 세대에게 나쁜 사회를 바꾸라 명하는 책임의 전가를 널뛰듯이 오갔다. 저 유명한 김용민의 '이십 대 개새끼론'은 후자의 정신 상태를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명문’이었다. 타인을 안타까운 피해자로 미화하는 한편 생각 없는 속물로 경멸하는 건 동전의 앞뒷면 같이 내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타인을 박제하는 태도다. 청년들은 자기 몫의 권리와 자기 몫의 책임을 지는 주체로 존중받지 못했고, 그들의 처지는 사회적 계층 관계 속에 객관화되지 않았다. 세대론이 부상할 때 제기된, 세대 간 착취 구도의 허구성과 청년들이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아니라는 비판은 더 비중 있게 회자되었어야 한다.
2010년대 중반에 유행한 헬조선 담론은 세대론의 변주된 버전이었다. 젊은 세대의 피해자 의식은 피학적 자기애에 이르렀고, 지옥을 부른 이들과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회관이 못 박혔다. 헬조선 담론이 해로운 건 사회에 대한 모호하고 극단적인 명명으로 날 둘러싼 모든 현실을 저주하는 편리한 수동성이었다. 내가 이 사회에 관해 짊어진 것은 무엇인가라는 책임감은 자리 잡을 수 없었다. 이때 절망이란 감정은 현실에 시달리는 자아가 깊숙이 가라앉은 채 의식의 근력을 풀어헤칠 수 있는 도피처다.
젊은 세대는 사회적 역할을 자각하며 다른 계층과 연대하는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세대론은 긴 시간 진보 진영의 주류 담론으로 유통되며 '우리'를 진보적 의제의 주인공으로 보살펴야만 한다는 '응석'을 부추긴 건 아닐까. 몇 년 전 메갈리아 사태를 돌아보자. 젊은 남자들은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진보 언론에 충격과 분노를 토했는데, 날 '피해자'로 편 들어주던 언론이 날 '가해자'로 지목했다는 배신감이었다. 연이은 절독 선언은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상실감과 보복 심리였다.
몇 년 전부터 진보담론 시장의 테마는 세대론에서 여성주의로 교체되고 있다. 이 과정이 두 담론 사이 인정투쟁으로 펼쳐진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여성이 약자라고 할 때 젊은 남자들의 항변이 무엇인가. "우리도 기성세대에 비하면 약자"라고 말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자원 배분을 놓고 젠더와 세대라는 갈등축이 경합을 벌이는 구도인데, 세대론과 헬조선 담론은 세대 내 젠더 차별을 묵살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성차별은 기성세대가 했는데 왜 젊은 남자한테 그래. 헬조선 몰라? 너희만 힘들다고 할 거야? 나도 힘들다고! “
현재 젊은 층에서 세대론은 여성혐오와 유착한 상태다. 더 꼬집어 말하면 여성주의와 투쟁하는 이들이 인용하는 이데올로기는 반여성주의가 아니라 세대론이다. 이 심각성을 무겁게 각인해야 한다. 이건 세대론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세대론을 어떻게 소비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에 대한 저마다의 책임감을 깨우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가 아닌,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안하는 주체의 기획이 하루빨리 후속 담론으로 나타나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고된 처지라는 건 차고 넘치게 알고 있다. 그걸 남을 억누르는 면죄부로 쓸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