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수 님의 정의기억연대 비판
나는 정의기억연대를 잘 모른다. 지난 수십 년 간 '위안부' 피해자 운동이 어떻게 지속되었는지도 정의기억연대 활동가들보다 잘 알 수가 없다. 이용수 님에 대해서도 곁에서 함께 생활하고 조력한 그들 보다 잘 알 수가 없다. 비록 이용수 님이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로서 정의기억연대 측을 비판하였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타인을 돕는 운동을 하는 건 어떻게 봐도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이 이용수 님의 비판에 대응하는 태도와 어법이 합리적인지는 말해 볼 수 있다. 그건 '위안부'란 논제에 관한 지식과 운동가들이 운동을 위해 바친 알려지지 않은 시간을 넘어, 겉으로 알려진 그들 입장의 일관성과 보편타당함을 따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용수 님은 '모금이 피해자들을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이용을 당했다, 수요집회도 의미가 없다, 윤미향 당선자에게 덕담을 한 적도 없다' 주장했고 정의기억연대 측은 대강 이런 취지로 설명했다. 이용수 님의 기억이 달라져있다,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이 있다, 인권과 명예에는 관심 없고 돈을 받고 끝내려는 사람이다, 이용수 님의 오해다... 해명을 접하는 사람 입장에서 저 말은 이용수 님이 고령이기 때문에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리고 정의기억연대가 이런 주장을 해명으로 쓰는 순간, 정의기억연대가 걸어온 그동안의 활동도 모순에 처하게 된다. 이용수 님이 자신이 겪은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이고, 사실을 분별하지 못한 채 옆에서 부추기는 대로 기자회견까지 했다면, 지금껏 정의기억연대가 곁에서 함께하는 상태로 그분이 전면에 서서 주장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은 무엇이 되는가? 이용수 님은 불과 일이 년 전에도 카메라 앞에 나와 일본 정부의 배상 결정을 성토했고 트럼프 대통령과 포옹을 했다. 그건 그분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면서 이건 남에게 휘둘린 결정이라는 건가?
이건 익숙하면서 낯선 광경이다. 피해자의 폭로가 있을 때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이 있다"라고 진실성을 부인하는 수구 세력들의 논리, "위안부 할머니들은 제대로 된 판단 능력이 없다. 운동가들이 옆에서 부추기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던 '위안부' 운동 비판자들의 논리와 빼닮았다. 닮을 리 없다고 보이는 이들의 논법과 닮았기 때문에 낯 선 것이다. 물론 어법이 닮았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사실도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잘 알 수 없지만, 정의기억연대 측 말 대로 이용수 님의 기억에 오류가 있는 게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런 어법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위안부' 운동단체가 '위안부' 당사자의 주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어법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못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뱉어지는 순간, 이용수 님의 말은 선입관을 쓰게 된다. 그분이 뱉는 다른 말들, 나아가서 지금껏 뱉어 온 말들도 동일한 의구심과 대면하게 된다. 운동의 당사자로서 뱉는 말이 세상에 온전히 청취되지 못하고 말을 뱉기도 전에 진실성이 의구심에 부쳐진다. 말과 기억의 사실성 여부를 떠나 그분이 기자회견장까지 나와 지금껏 하지 않은 말을 하게 된 데에는 상당한 결심과 그걸 끌어낸 어떤 감정과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30년 간 이용당했다'는 진술에는 무거운 감정과 느낌이 서려있다고 들린다. 나는 그분이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고 싶다. '기억 왜곡'이나 '부추기는 사람' 같은 일체의 선입관이 씌워지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나는 그것이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기본이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이용수 님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정의기억연대 측은 어떻게 대응했어야 할까.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오해인지,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운동이 복무하는 당사자의 문제제기다. '위안부' 운동은 국민적 정서와 '역사관'에 힘입어 지금까지 존속되었고 운동 단체들이 그걸 국민들에게 호소해왔다. 공익을 지향하는 성격이 강한 단체이니 만큼, 이 기회에 관련 내용 일체를 상세하고 투명하게 공개하고 가는 것이 정의기억연대 측의 차후 활동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와 논쟁 혹은 진실 싸움을 하는 것 같아 보여서 껄끄러울까? 그 껄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기억 왜곡‘, '부추기는 사람' 같은 말을 붙이는 것보단 낫다.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접수하고 같은 위치에서 논쟁하는 것이야 말로 상대방을 문제제기의 주체로 존중하는 길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체 이름이 정의'기억'연대다. '위안부' 운동 역시 피해 당사자들의 '기억'을 경청하며 과거에 접근하고 역사를 구성해 온 운동이다. 그런데 이제는 피해자의 '기억이 왜곡'됐다고 말한다. 이런 아이러니를 감당하며 봉합하는 것이 특수한 성격을 가진 운동 단체로서 걸머져야 하는 책임이었다고 하면 과도한 말일까?
- "21대 국회에서 ‘죽은 자들의 몫까지 함께 해내는 운동’을 만들어가려 합니다. 그 길 밖에 제가 갈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윤미향 당선자가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확실히 운동은 살아남은 '피해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보편적 목적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분의 입장과 별개로 내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살아있는 피해자의 권익에 앞서는 운동의 가치는 없거나 예외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위안부' 문제처럼 피해자들이 고령에 이른 운동은 타임워치를 켜놓은 운동이다.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그들의 권익을 구제할 수 있는 실질적 해결책을 찾는 것이 우선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국민 모두의 '역사관' 같은 막연하고 거대한 관념보다 무겁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의 권익이 "죽은 자들의 몫"이 되어 흩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피해자의 외침 앞에서 저 말이 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