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에 발 붙이고 사는 법 터득하기.
그래서 결정한 곳이 바로 다 가구 주택 1층.
(건축법상 엄밀히 다세대 주택과 다 가구 주택은 다른데, 나는 빌라나 연립 같은 분위기가 아닌 단독 주택에 독립된 계량기를 달고 여러 가구가 거주하는 형태를 다 가구 주택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반 지하에 두 세대, 1층부터 2층까지 각 두 세대. 3층 주인집, 옥탑 방 한 세대 도합 여덟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신혼집은 지하철 역까지 좀 멀다 싶게 걸어야 하는 거 빼곤,
전통시장 가깝고, 비슷비슷한 집들도 꽤나 모여 있어 나름 주거 촌으로 안전한 느낌까지 주었다.
그러나 이건 집 뒤 편 분위기였고, 아주 잘 산다는 주택가가 아닌 다음에야 주택가와 상권이 제대로 분리된 동네가, 그것도 당시(1990년대 후반) 신림동 어디에 있었겠나..
바로 집 대문 앞으로 약 2분 정도 걸어 나가면 밤이면 밤마다 휘황 찬란 딴 세상이 열리는 동네가 펼쳐졌다. 진짜 황금마차가 그려져 있었는지 아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가장 화려한 불빛은 ‘황금마차’라는 카바레를 필두로 시작됐고, 그 옆으로 작은 술집들에 밥집까지 대 여섯 개, 슈퍼마켓까지 밤늦게까지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딱히 신혼부부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는데, 눈뜨면 출근하고 해져야 퇴근하느라 바빴던 우리는 지친 심신을 달래느라 쉬는 날에도 집에 쳐 박혀 있거나, 근처 공원으로 산책 정도 하는 것 말곤 집을 들락댈 일이 없었다.
그러니 동네 카바레가 황금마차인지, 호박마차인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심지어 누군가 동네 길에 익숙지 않은 손님을 맞을 때, 우리 집 찾기 가장 쉬운 방법으로 동네의 랜드마크, 황금마차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열이면 열, 거기서 거기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헷갈리는 다 가구 주택 가운데 우리 집을 참으로 쉽게 잘 찾아내고들 했다. 지금에야 생각하면 신혼집이니 별 걱정 없이 그 동네에 살았지 한창 동네를 돌아다니며 뛰어 놀 애가 있었다면 아마도 좀 꺼림칙해했을 게다.
이 집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넓은 거실이었다. 아기자기 혹은 개성 넘치게 신혼집을 꾸밀 욕심에 큰 공간이 반가웠던 게 아니라 비슷한 가격의 집 치고 속이 뻥 뚫리게 큰 거실은 마치 내가 큰 집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줬던 것 같다.
큰 거실에 큰 창문. 작은 집에 사는 답답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그런 느낌 말이다.
아파트가 아닌데 마치 아파트 베란다로 나가는 거실 문처럼 큰 문에, 안방 창문도 어찌나 큼직큼직하던지.
그냥 속이 다 시원했다.
겨울엔 좀 춥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원래부터 겉모습에 약한 내가 내린 결정이란 게 그렇다.
나중에 후회할지라도 당장 눈에 보기 좋고, 맘을 뺏겨 버린 거다. 답은 이미 결정됐다.
덕분에 첫 신혼집에서 보낸 두 번의 겨울 동안 신랑과 나는 속만 시원했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 없이 매서웠던 겨울 외풍을 막느라 문풍지 류의 스펀지를 창틀을 따라 꼼꼼히 두르는 연중행사를 해야 했다.
이렇게 거실이 넓으니 다른 공간은 어땠겠나.
보다 현실적인 안목을 갖게 된 지금에야 생각하면 쓸데없이 넓은 거실에 비해 주방이 상대적으로 너무 좁았다. 긴 직사각형의 거실을 넓게 펼쳐 약 3분의 1 가량을 자르고, 다시 그 3분의 1을 화장실과 주방 공간으로 각각 나눴는데 화장실이야 별도의 문이 달려있고 들어갈 짐이라곤 세탁기 말곤 별 게 없었으니 그다지 좁은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주방은 사정이 달랐다.
우선 보통 싱크대는 동선을 따지고 수납공간을 고려해 ‘ㄱ’ 자, ‘ㄴ’ 자로 배치되기 마련인데 우리 집은 가스레인지를 놓는 곳을 제외하고 딸랑 위로 3칸 아래로 3칸이 싱크대의 전부였다.
그러니 설거지 싱크대 말고 각종 재료를 다듬고 세팅 등등을 할 작업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싱크대 주변으로 냉장고에 전자레인지, 밥 솥까지 주방 가전을 쭉 둘러놔야 했으니 그야말로 집약적 배치 체계, 한마디로 복잡 그 자체였다.
위에서 보자면 텅 빈 거실 한편에 살림살이를 한데 몰아넣은 모습, 그거였다.
예나 지금이나 주방이 좁으면 일하기에도 정리하기에도 주부가 가장 고생이라고 나 역시 큰 상을 차릴 일이 생기면 진땀을 빼야 했는데 하필 가장 일 머리 없고, 아는 것 하나 없을 그 시기가 손님맞이는 인생 최대로 많을 시기였다. 작업 공간이 부족하니 손님 상 한번 차릴라치면 우선 주방에서 손 닿는 거리 내외로 각종 재료와 그릇들을 쭉 깔아줘야 일이 가능했고, 일을 하다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라도 하려면 발끝을 세워 퐁당퐁당 뛰어다녀야 했다. 물론 김밥이라도 말라치면 마룻바닥에서 시작해 마룻바닥에서 마무리 짓는 게 순서였다.
허나 부엌 살림살이가 남달리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해 먹기보다 가져다 먹는 게 더 많았던 때라 별문제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냈고, 무엇보다 어차피 살고 있는 집 투덜대야 뭔 수가 나는 것도 아니니 그저 잠시 불편하다가 잊고, 또 불편하면 그런대로 곧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아냈다.
처음으로 독립해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둘이 살기 시작한 곳, 신림동 신혼집.
‘처음’이라서 신선하고, 감사했던 일들만 가득했다면 긴장감이 없고 오히려 심심했을까,.
결혼 전, 별 것 도 없는 거 같은데 답답하고 또 가끔 막막하던 세상이 결혼을 하고 나면 최소 반투명 유리 정도의 맑기 까진 개이면서 인생이란 뿌연 실루엣을 잡을 수 있겠지.. 했던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딱 둘이 사는 순간부터 결혼이란 실상 둘만 사는 것도 아니고 (두 집안을 번갈아 배려하며 산다는 게 나한텐 결코 쉽지 않았다), 둘이 살아 생기는 갖가지 현실 문제로 쉼 없이 삐그덕 대느라 인생 실루엣 운운할 여유조차 갖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곳에 살던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것 말곤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둘이 같이 살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처리해야 할 지극히 현실적인 일들이 줄을 섰다.
다양한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 나는 ‘저~어~쪽’ 삶을 접고 확실히 ’이 쪽’, 현세의 삶을 살기로 작정해야 했다.
하지만 미션도 쉽게 클리어 되는 게 아닌지 아,, 이건 좀 아닌데 하면서 3,4년,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3,4년.
별 수 없게 다시 3년, 5년.
그러다 보니 한 세상 지나갔고 돌아보니 그게 인생이었던 건가, 아닌가,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지경. 뭐 그렇게 됐다. 지금이야 이런저런 다반사에 내성과 내공이 쌓여 ‘척척’ 까지는 아니어도 ‘담담’을 가장할 정도는 된 듯 하지만 당시 맞닥뜨린 현실 중, 단연코 최고는 거주 일 년 반이 지나자 칼 같이 기한에 맞춰 적지 않은 전셋값을 올려 받겠다는 주인집의 통보였다.
<내가 번 것으로 자력갱생 하기 충분하게 세상은 설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난 열심히 만 살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이고 뭐고, 그 집에서 계속 살려면 돈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집이 없던 우리 부부가 번 돈으로 자력갱생 하기에 전셋값은 2년마다 너무 가파르게 오를 게 분명했고, 출산까지 임박한 나는 나의 ‘적절한 경제관념’을 어느 정도 손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신림동 신혼집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우린 겉보리가 서 말 만 있어도 안 한다는 ‘처가살이!’를 하기로 작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