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그녀 2. : 친구야, 닥치는 대로 해결하자
“그래서 니 해결책은 ‘놀아라!?’”
“응, 쉬니까 문제가 다 해결되더라고. …. 난 그렇더라고”
“……나도 쉬어 보까?.. 이제 정말 힘들다고 말할 힘도 없다.”
일하는 여자들의 슬럼프는 다 비슷한 시기에 오는 걸까,.(어째 여자만 그렇겠나. 주변에 여자가 많으니 여자들의 경우를 많이 접한 거겠지) 친구 K 역시 일 한지 18년 차가 되자 아침이 두렵고, 하루를 견디기가 쉽지 않으며 급기야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다음 순서는 자연스럽게 남편과 대판 싸우기. 해선 안 될 말까지 콸콸콸 쏟아부은 다음, 하루 밤이 지나고 나서야 폭풍 같던 마음이 겨우 가라앉긴 했지만 K는 여전히 우울하며, 그러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무실에 나가야 하는 자기 신세가 처량할 뿐이라며 한 바닥이 넘는 메시지를 보냈다(노안이 와서 뭐든 쓰고 보는 게 힘들다더니 신세한탄이 노안을 이겼네 그려).
‘이런 문제는 또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받아야지..’ 시차를 맞추고 K의 스케줄을 짐작해 보이스 톡을 넣는 나.
이미 메시지로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처음부터 다시 토해내는 K.
“그래도 넌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는 거 쟎냐. 난 진짜 안 맞았다니까.”
“그렇긴 하지, 근데, 요즘 들어 자꾸 자신감도 떨어지고.. 말은 더 안 되는 것 같고..”
(K는 미국에 산지 벌써 25년이 다 돼가는 거의 미쿡 사람으로 남들 하는 공부에 공부를 더해 가방 끈을 길게
늘여 구직 선택의 폭을 넓히더니 나름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 일하고 있는 반 백 살 워킹맘이다. 평균보다 잘
살았던 집안 덕에 걱정 없이 공부했나 싶지만 다른 부분에서 남만큼 혹은 남보다 더 맘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K나 나나 인생사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길, 끝까지 살아봐야 아는 길이라 늘 노래한다)
“좀 쉬어봐. 나도 당장 일 그만두면 진짜 무슨 일 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아. 완전 편해지긴 하더라.”
“근데, 쉬면 뭐하냐?”
“뭘 하긴? 뭐라도 할 수 있지. 그리고 일단 그만두고 나면 걱정할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쉬는 것부터 하셔요.
뭘 할지는 그때 생각해도 안 늦다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일하는 것 말곤 해 본 게 없으니 당장 그만두면 어떻게 시간을 채워야 하나 걱정하고 있는 반 백 살 아줌마. 그럴 정신이 있는 걸 보니 아직은 버틸 힘이 있는 모양이다 답하니 왈칵 짜증이다(내가 잘못했다). 날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식구들 도시락 4개 챙겨 출근해, 남들은 한창 초저녁인 밤 9시면 잠자리에 들어야 해. 그렇다고 집안일을 누가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애들은 자력갱생 혼자 크는지 마는지, 엄마 노릇 못해 드는 죄책감은 나날이 쌓이며.. 나라고 못 놀아서 안 노는 줄 아냐… 당장 그만 두면 대학 갈 애들이 둘이나 있는데 학비는 어떡하고.. 미국 학비가 돈이 얼만 줄 아느냐… 그리고 20년 넘게 미국에 살았는데 아직도 죽어라 내 말을 못 알아 처먹는 척하는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으며….
아…. 아…. 그래, 태평양 건너라고 별 수 있겠나…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며칠 지나고 연락할 걸… 어줍지 않은 위로라도 했으면 다행인데 아무래도 다시 열만 오르게 한 것 같아 오히려 미안.. 결국은 네버엔딩 신세한탄만 하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났나, (아마도 47세 이하만 면접을 볼 수 있다는 구인 광고를 보고 나서였던 듯) 일을 그만두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닐 것 같으니 생각 없이 덜컥 그만두지 말고 당분간 쉬는 방법으로 돌려보는 건 어떻겠냐 훈수를 두려 다시 친구 K에게 보이스 톡을 했다. 다행히 남편에게 못할 말까지 콸콸 쏟아부을 정도로 치솟았던 분노 게이지는 정상선 까진 아니지만 어느 정도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으나 아침마다 상쾌하고 감사한 느낌까지는 아니란다. 그리고 이어지는 현실 자각 기반의 입장 정리. 아무래도 애들 대학 학비 때문에 당분간 일을 그만두는 건 어려울 것 같고 많이 쉬어야 한 달이다. 그래서 결국은 당분간 우울할 일뿐 이라고. 나는 바로 이때다 싶어 냉큼, ”그래! 잘 생각했어. 내 쉬어보니 좋긴 하드만 평생 일을 안 하고 살 순 없겠더라. 내가 쓰일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건데..” 라며 기분을 좀 북돋워 주려 했다. 그러나 역시 친구나 나나 ‘엄마’가 일을 하기에 (특히 한국은 더) 좋은 환경이란 없으며,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가능하다 하더라도 가족이 있는 상황에선 결국 버느라 고생한 ‘돈’을 팍팍 쓸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며, 그 돈이라도 벌려면 결코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일’을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우리 모두는 ‘일’을 그만두는 게 두렵고, 그 이유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돈’으로 생활하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일수도 있다는데 동의했다. 조금만 더 했으면 마르크스, 레닌 할아버지들의 자본론을 넘나들 뻔했으나 두 사람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돈’ 임을 인정하면서 결국 이렇게 저렇게 또 한 고비 넘기고 버티면서 갈 때까지 가보자..로
어영부영 맺으려는데, 간만에 날씨가 우울하다더니, 그날따라 조용해서 이 생각 저 생각했다더니…
내 친구, 울컥하고 만다.
“까짓 학비야 애들도 곧 성인이니 일부 감당하게 하면 되고. 쉬는 거야 어떻게든 이유야 만들면 되는데…”
“그런데?”
“자신이 없어. 일 그만두면 누가 날 다시 쓰겠나 싶고. 다시 일한다 해도 잘난 애들 사이에서 적응하느라 고생할 자신도 없고,…. 그런데 더 웃긴 건 일을 안 할 자신도 없다는 거.”
친구는 그렇게 한참을 예전 같지 않은 체력, 멘탈, 근성 등등을 두루 점검, 한탄하더니 결국은 ‘일을 그만둔다, 만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진 본인의 상태가 문제이며 이게 과연 회복이 가능한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 우린 둘 다 충분히 알고 있었다.
우리의 네버엔딩 신세한탄이 오직 ‘돈’때문은 아니라는 걸. 이 십 년 정도 일하다 보면(혹은 주부로만 살았어도) 그럴 수 있지 않은가? 슬쩍 지루한 게 아니라 못 견디게 지루하기도 하고, 누구보다 나를 못 믿을 만큼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거기에 정말 사는 게 이게 다야?.. 허탈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처럼 말고 다르게,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지기도 하고.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살았는데도, 자기 자리에서 나름 산전수전 공중전 해치우며 내공을 쌓았다 하는데도, 덜컥 이런 고민들이 무섭다. 겨우 이렇게 밖에 못 산다 하면서도 결국 이렇게도 못 살까 봐 정신이 많이 산란한 거다. 그래서 결국 만만한 ‘돈’이나 핑계 삼으면서 하루하루 겪어내고 있는 거다.
친구야. 너는 또 이렇게 한고비 넘기려나 보다.. ............
뭐.. 이제 대충 감이 오지 않냐?
이 고비 넘기면 또 머지않아 뭔가 또 올 거야.
그 다음이 뭘지 모르겠다만 우리 닥치면 해결하자꾸나.
닥쳐도 시원하게 해결이 안 되는데 미리 당겨 고민한다고 별 수 있겠냐?
그리고 살다보니 그렇지 않드냐..
꼭 해결하지 않고 지나가도 잘 만 살아지더라는 걸!
그러니 친구,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