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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Jul 23. 2019

내가 아는 그녀 1.   

나는 요즘 잉여인간으로 사는 것 같아.

2년 만이었다.

얼굴 한 번 봐야지, 밥 한번 먹어야지,.. 그러다 2년이 흘렀다.

2년 만에 얼굴을 본다 하면 아주 오랜 시간 못 본 것 같지만 살아보니 오래도 아닌 게, 명절 몇 번 지나가고, 끝도 없는 집안 대 소사 치러내고, 거기에 어느 집이든 자식 입시 순번이 돌아오게 되면 같은 도시에 살아도 자주 못 만날 이유가 충분해진다.

예전에야 사람 관계라면 무조건 자주 봐야 좋은 건 줄 알았지만, 이젠 자주 봐도 정이 안 가고 어딘가 불편한 사람보다 간혹 만나도 여전하고 넉넉해 마음이 편한 사람이 고맙다. 그 간혹 리스트 중 한 사람이 M이다.


M은 전업주부다. 지방 학교 선생님이었던 언니는 결혼 후, 5년 정도 교사생활을 하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책임질 일에 휘말렸는데, 책임지라면 ‘까짓’ 책임지고 말지, 하면서 깔끔하게 사표를 내고 언니 말대로 집에 들어앉았다. 전업주부로 이직한 거다. 그런데 주부생활이라는 게 그렇다. 시간에 비해할 일은 없어 보이고, 한 일에 비해 티는 별로 안 나고. 하지만 사람에 따라 일이 달라지기도 한다고 언니가 꾸려가는 가정은 Home, sweet home, 그야말로 다른 누가 주관하는 가정보다 행복했고, 그 결과는 매우 값어치 있었다.

그러니까 ‘다복’했다.

일찌감치부터 그림 같았던 딸은 잘 자라 남들 모두 부러워라 하는 기숙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대학도 탈 없이 들어가 줘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반면 둘째인 아들 녀석이 가끔 뜻하지 않게 말썽을 일으키긴 했지만 한창 사춘기 애들이 시키는 고생에 비하면 코웃음 치고 넘어갈 일인지라 언니는 속을 끓여도 주변 사람들은 그 정도면 은혜롭다 여기라며 하소연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어쨌든 언니의 수고와 살핌 덕에 둘째까지 대학을 보내고 남들 모두 부러워하는 입시 졸업 달성! 드디어 미뤘던 약속을 잡았는데 유난히 서둘러 만나기로 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여느 때처럼 정겨운 안부 인사가 아니라 언니의 길고도 긴 메시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긴 메시지의 핵심 문장은 다름 아니라 ‘나는 요즘 잉여인간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반전도 반전 나름이지…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았다.


아무리 2년 만이라지만 너무 갖춰 입고 나온 그이를 보자니 내가 너무 성의 없는 차림인가 싶어 잠시 민망. 그리고 우리가 항상 차려 입고 만났던가.. 애써 기억해 보았으나 역시 언니가 과했다. 식사를 하고 두루두루 가족 근황을 묻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잉여인간’의 진짜 의미를 추궁해야 할 시간. 우선 자기가 과하게 차려입고 나온 이유가 바로 ‘잉여인간’으로부터 탈출하려 하다 보니 입게 된 건데, 나를 만나러 오기 직전, 면접을 보고 오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정장을 입어야 했단다. 귀로 번쩍 지나가는 호외!


“언니! 축하해요! 축하! 축하!”


“축하는 무슨! 면접 보고 온 거라고! 취직한 게 아니라!!”


“아니, 꼭 취직해야 축한가? 다시 일해보겠다고 결심한 게 어딘데!! 그 걸 실행한 자체가 축하받고도 남을 일이지!”


“아이고, 그래도 자기는 축하까지 해주네. 다른 사람들 아무한테도 안 알렸어.”


사연인 즉, 동네 모임에서 언니가 앞으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말을 꺼냈다가 “아니, 남편이 돈 안 벌어?”, “그냥 놀지 뭐 하러 나가?’’, “요즘 힘들어?” 부류의 반응을 시리즈로 겪고 그 후론 웬만해선 일 하고 싶다느니, 일을 구하고 있다느니 더 이상 입에 올리지 않기로 했단다. 대부분 중년 주부가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면 나오는 반응이라 놀랍진 않지만 거기에 ‘자아’니 ‘존재’니 ‘성취감’이니 구구절절 설명해봤자 돌아오는 반응이 달라지기도 힘드니 애당초 그쪽은 신경 끄는 게 답이다 결말 짖고, 오늘 본 면접으로 자연스레 이야기가 넘어가는데,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안 그래도 한 목소리 하는 이 양반, 거의 확성기 수준 데시벨로 목소리가 올라간다.


“말도 마라. 내가 지금 뭔 꼴을 당하고 온 줄 아니? 면접 약속이 있으면 사람이 오기 전에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도착하고 사무실 아가씨인지 누군지가 올라오시라, 어째라 연락하고도 20분 뒤에 사장인지 뭔지가 나타나더라. 그러더니, 하!! 기막혀서. 먼저 늦어서 미안하다, 그래야 하는 거 아니니? 근데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아! 그러니까 볼 품 없는 아줌마다 이거지. 아래 위로 한 번 훑더니 자기네 업무가 컴퓨터로 어쩌고 저쩌고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냐고!!? 그즈음되니 나도 뚜껑이 열리데. 그래서 나도 당당하게 그랬지. 내가 뭘 배우는데 늦는 사람은 아니니 그 정도면 하루나 이틀이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 일 하자고 합디까?”


“아니. 가만히 이력서를 훑어보더니 ‘가까운데 사시네요.’ 그러곤 ‘연락드릴 테니 들어가세요.’ 이러더라!!”


“아…… 어….”


여기까지는 하필이면 재수 없는 일진, 잊으셔요! 다독이면 될 법한 에피소드. 그런데 이어지는 핵심 스토리인즉, 언니 상식엔 말도 안 되게 무례한 면접을 마쳤으나 궁금해할 남편을 위해 내키지 않지만 이러저러했노라 보고를 했는데, 바깥양반, 당황한 언니를 다독이기는커녕, 정말 그렇게 면접을 봤냐, 말도 안 된다, 어디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오냐, 뽑아주시기만 하면 정말 열심히 일 할 거다 이렇게 해도 뽑을까 말까인데,.. 끌끌 혀를 차며 진작에 글렀으니 이번 건은 포기해라 종용. 이런 아저씨 멘트에 더욱 황당한 언니, 이게 어찌 내 태도의 문제냐, 20분이나 늦고는 미안하다 말 한마디 없이 훑어보는데 열심히 하겠다, 뽑아 달라 굽신굽신,. 그런 말이 나오겠냐 반격. 그러나 마지막 멘트로 간단히 상황 종료.

“난 매일 그러고 산다…”


이후 언니, 나, 모두 2초 침묵

그리고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완전 진심 충만 추임새! “감사할지어다!!”


“어. 감사하지! 그리고 많이 불쌍하고..”

다시 경건.


언니는 도저히 판을 뒤집을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웃으면서 마무리하는 게 답이다 싶어 결국 이런 환경 속에서 여태 살아남은 걸 보니 당신이야말로 진짜 사회성, 생존력, 생활력, 모두 뛰어난 거 같다. 우리 그냥 잘 해온 사람이 하던 거 하자. 그러니까 열심히 일해!! 그러고 전화 뚝.

이러니 어찌 자기가 잉여인간이란 생각이 들지 않겠냐고. 오늘까지 본 면접이 세 군데, 내일모레 네 번째 면접을 과연 봐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봐도 역시 전화는 오지 않을 것 같고, 그냥 이러다 말 것 같은데 이제 어쩌면 좋겠냐… 살림, 육아, 교육, 뭐라도 묻기만 하면 시원하게 척척 답해주던 언니가 나에게 묻는다.


그 상황엔 뭐라도 답을 했어야 했다.

원래 나만 힘들다고 생각할 때 나보다 더 힘든 타인을 보면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가 요즘 어떻게 구직 생활을 하고 있는지, 구구절절 필요 이상으로 디테일하게 설명했고, 그 노력과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나를 찾지 않으며(2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이유가 나 말고도 잘난 사람이 너무 많아서이며, 우리의 아픔은 단군이래 최고 스펙이라는 요즘 젊은이들의 아픔에 비하면 꾀병 급일 수 있으니 용가리 통뼈가 아닌 이상 현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낫겠다..로 나름의 결론 도출.


이후 우린 오랜만의 회포를 충분한 입 운동으로 풀었고 누구라도 구직에 성공하면 반드시 축하파티를 열자며 열심히 일한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간만의 과한 입 운동으로 피곤했던 나는 숙면을 취했고, 최근 늘 그랬듯이 오늘 아침에도 노트북을 열었다. 역시나 적당한 일자리를 찾진 못했지만 업데이트된 구인난을 꼼꼼히 체크하고 혹시나 다른 아이디어라도 생길까 생경한 회사도 들락거린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어려운 시기 같이 너나없이 힘든 구직 메이트, 언니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누가 뭐래도 내가 해보고 싶은 건 해봐야죠. 돈을 벌고 싶어서든, 나를 찾고 싶어서든, 남는 시간을 채우고 싶어서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러니 오늘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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