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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ntie J Jul 09. 2021

멈출 수 없었던 우리의,

 도돌이길

당시는 좀 많이 거슬러 올라가 1985년. 초등생 T와 J는 요즘 말로 베프, 절친이었다.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다. 학기 초 너나 할 것 없이 맹숭맹숭 지내던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J의 집으로 T가 놀러 가면서 갑자기 둘도 없는 사이로 발전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T와 J는 한창 유행이었던 종이인형 놀이에 예외 없이 푹 빠져 학교에서도 서로의 인형을 뽐내며 소장하고 있던 각종 액세서리와 옷을 서로 바꿔 입혀보네 마네 어울리네 마네 쉬는 시간마다 분주했다. 그러나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고서야 서로의 아이템을 함부로 빌려주지도 빌리지도 않는 묵시적 룰이 있어

친구의 옷을 꼭 한번 내 인형에 입혀 보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순간이 잦았다. 그러던 중. J는 T를 자기 집으로 불러 마음껏 종이인형과 옷을 만들며 원 없이 놀아보고 싶었다.

J의 초대에 T는 흔쾌히 가겠노라 답했고 그렇게 그날 방과 후 일정이 시작됐다.


J의 집은 산 주변이었다. 지금이라면 전원주택이라 불릴 조건을 충족한 집이었다.

T의 집은 시장과 정류장에서 멀지 않아 J의 집 근처에 비하면 도시 속 주택이었다.   

약수터 동네라 불렀던 J네가 있는 산동네는 학교에서 가기엔 그리 멀지도 않고 길도 나쁘지 않았다.

J의 집은 잘 지어진 2층 양옥집이었고 T의 집에선 보지 못한 신기한 물건들도 많았다.

T는 처음 본 물건 구경이 더 재미있었으나 당일의 목적은 종이인형놀이. 둘은 흰 스케치북을 펴 인형을 그리고 치마에 바지에 귀걸이, 가방까지 만들어 빨갛고 파란색을 입혀 오리고 걸치며 두 어 시간을 잘 놀았다.     


오후 4시. 저녁 전에 집에 들어가려면 일어서야 할 시간. J는 길을 모를 T를 걱정해 T가 집을 찾아갈 수 있는

곳까지 동행을 결심했다. J의 집에서 T의 집까지는 얼추 다섯 정류장. 산기슭의 집을 벗어나 산 뒤편으로 올라 그러니까 고개 하나를 넘어 내려가야 T가 살고 있는 집 건너 시장이 나온다. 다행히 이미 사람들이 꽤나 모여

사는 동네가 만들어져 있어 길도 있었고 걷기 힘든 곳도 아니었다. T는 고개의 정상 즈음까지만 가면 대충

어떻게 집까지 가야 할지 알 것 같았다.     


J와 손을 잡고 열심히 수다를 떨면서 걷자니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둘은 이제 그만 ‘안녕, 내일 보자’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무언가 아쉽다.

그때 J는 조금 더 데려다주겠다 제안한다. 에어지기 아쉽던 T는 왈칵 신이 났다.

둘은 다시 손을 잡고 내려오며 온갖 이야기를 다 한다.

서로 반의 어떤 남자아이를 좋아하는지는 이미 커밍아웃했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학교 이야기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집안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T와 J는 엄마 아빠 이야기부터 본인들이 알고 있는 집안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시장이다.

시장까지 내려왔으면 이제 T의 집이 지척이다. 그런데 J는 발길을 돌릴 생각을 안 한다.

둘은 그렇게 결국 시장까지 내려왔다.


이제 아무래도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순간. 그런데 T는 여기서 혼자 집까지 돌아갈 J를 생각하니 미안하다.

T는 다시 고개까지 같이 가겠다 한다. J는 괜히 신이 난다.

둘은 나란히 방향을 다시 돌려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간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길고 많은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이젠 말끝마다 ‘너만 알고 있어, 너한테만 하는 말이야,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 약속에 맹세까지 거듭된다.


두 친구는 고개까지 올라가서 다시 내려왔다. 같이. 그리고 올라갔다. 역시 같이.

이미 주변은 어스름하고 T와 J 둘 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종아리가 뻐근하다.

그러나 이젠 정말 안녕을 고해야 할 순간인 걸 알겠다.

둘의 생각에 딱 중간이라 생각되는 지점에서 둘은 손을 놓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T는 엄마에게 몇 달치 욕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 J와 T 모두 업혀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푹 잠들었다.     

 

11살 인생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서로가 쏘울 메이트란 걸 알아차리다니! 두 친구는 학년이 바뀌어 반이 달라졌지만 역시나 짝꿍처럼 붙어 다녔다.

서로에게 약속한 비밀과 맹세는 빈틈없이 잘 지켜졌다. 그러나 6학년 초, J는 이사를 해야 했다.

둘은 서로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말고 연락하자 했으나 중학교에 입학하고 중학생 수준의 바쁜 일상이 지속되며 자연스레 서로 연락이 닿질 않게 되었다.     


T의 동네 근처 초등학교는 오후에 근처 주민들에게 운동장을 개방한다.

누구라도 들어와 어떤 운동이라도 할 수 있다.

집집마다 저녁시간이 지나고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동네 곳곳에서 사람들이 운동장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다들 열심히 운동장을 돌기 시작한다. T처럼 혼자 운동하는 사람도 있지만 둘이 짝을 지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운동장을 도는 사람들도 있다. T는 오늘 저녁 이어폰을 빼고 T처럼 늘 혼자 운동장을 돌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한다.

그때 그 J도 오늘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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