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 산책길
L은 부산에서 태어나 20세 되던 해에 서울로 공부하러 온 뒤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이미 훌쩍 40세를 넘겼으니 부산을 떠난 지 이미 30년이 다 돼간다.
즉, 고향만 부산이지 부산 사람이냐 묻는 말에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어딘가 정체성이 진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그렇다면 L이 서울 사람이냐? 딱히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느라 서울 곳곳에서 줄기차게 버티며 살았지만 여러 형편과 이유로
경기도에도 몇 년 머물러야 했다. 한 동안 서울 사람, 때론 경기도민 그러다가 최근엔 인천, 그중에서도 바다
건너 영종도에 거주하게 되었다.
사는 동네에 따라 명명하는 법을 따르자면 이제 ‘영종도 사람’, 혹은 ‘섬사람’ 정도가 맞겠다.
‘섬사람’ L은 강도 아니고 바다를 넘어 섬에 살기를 결정하면서 처음엔 좀 기분이 이상했단다.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섬’은 처음이었으니까. 섬이라니 왠지 갇혀 사는 느낌이 드는 건 아닐까,
서울에라도 나가려면 하 세월이라던데,. 그러나 온갖 생각을 하다 본인의 거미줄 수준의 이주 필모그래피를
떠올리곤 곧 대한민국 구석구석 어디라도 사람 살기 힘든 곳 없고 무엇보다 살다 보면 다 적응하기 마련이니
걱정일랑 접어두자 결론 냈다.
그리곤 무엇보다 정을 붙이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동네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L은 새로운 동네에 살아야 할 때마다 무엇보다 길에 익숙해져야 한다 생각했다.
일주일 내내 들락거려야 하는 길은 기본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가벼운 산책길까지
내가 사는 그 자리가 눈에 익고 마음에 새겨져야 사는 곳에 ‘정’이 생긴다 믿었다.
L의 마음에 가장 먼저 익숙해진 길은 L이 시간만 되면 찾는 해안 산책로다.
집 앞이 인천 앞바다니 바다를 향해 걸었고 그러니 쭉 뻗은 산책로가 나왔단다.
동쪽의 구읍뱃터에서 서쪽의 인천대교까지 바다를 끼고 있는 얼추 8킬로미터의 해안 산책로는
하루에 한 번 걷기엔 여러모로 무리다. 그러나 걷는데 주저하지 않는 편이라면 다양한 테마로 날마다
다른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늘이 좋은 날, 노을이 좋은 날, 꽃을 보고 싶은 날, 흐리고 쓸쓸한 날,
밀물과 썰물에 나가고 들어오는 새들을 볼 수 있는 시간 등, 자주 나갈수록 다양한 테마가 만들어지고
걷기 코스도 다양해진다. 코스에 따라 걷는 시간도 매번 달라지기 일쑨데 얼마나 바다를 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는지, 구름 구경, 노을 감상에 빠져 있는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하늘과 노을만 볼거리는 아니다. 하루는 바다까지 나가는 길 중간에 후다닥 고라니가 지나갈 수도 있다.
해안 길을 걷다 무언가 꿈틀거려 놀라면 갈 길을 잃고 헤매는 뱀이 발 옆에 있다.
초가을엔 바다에서 작은 게들이 해안 길 위로 삼삼오오 몰려와 가던 길을 멈추고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소리도 그렇다. 여름은 바닷가 동네 어디에서 겨울을 났을까 걱정하게 만드는 개구리울음소리로 시작하고
수풀을 지날 때면 꿩이 화닥 거리는 소리에 지나가는 사람이 더 놀란다.
그리고 뭍에 살다 들어온 사람 누구에게라도 새로울 뱃고동 소리는 여기가 바로 바다 동네구나,
섬이로구나 느끼게 한다.
L은 살고 싶은 동네나 집을 쫓아 살지 못했다.
학교 따라 직장 따라 사정에 맞춰 움직이다 보니 취향보다 편의가 먼저였다.
그러나 이제 정착을 생각하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니 막상 자신은 정확한 취향이 없는 부류라 결론지었다. 취향 따라 살아오지 못하다 보니 있던 취향도 사라진 건지, 아니면 무취 향이 취향이 된 건지 여하튼 사는 곳,
동네가 어디건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어디에 살든 적응해왔고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다.
취향으로 따지자면 아니지만 사는 동네에 마음을 주고 나니 정이 들어 버렸고 정이 들면 취향의 문제로
마음 상할 일이 없어지기 마련 아니던가.
그냥 그렇게 살아졌던 거다.
그러다 보니 L에겐 사는 곳이 어느 동네인가, 어떤 집인가 보다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해졌다.
좋은 시간과 기억이 장소에 대한 취향을 이겨버린 거다.
L이 걷는 동네 길은 그래서 소중하다. 때론 가족들과 때론 오롯이 혼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왜 있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려주기 때문에.
L은 오늘도 해안 산책길을 걷기 위해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