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untie J Jul 09. 2021

모두 함께 줄지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전 8시 30분, 오후 4시 30분. 아파트 입구가 노란 차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오전엔 유치원 등원 차량이 오후엔 온갖 학원 차량들이 수업을 마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느라 줄을 선다.

아파트 입구뿐이 아니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노란 차가 따라다닌다.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니 목적지까지 한 번에, 별 걱정 없이 이동하기엔 그만이겠다 싶긴 하다.

그런데 꼼짝없이 차 안에서 집으로, 학원으로 움직이는 아이들을 보니 확실히 별 재미는 없겠다 싶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1980년대 초반. 학원이란 것도 흔하지 않았지만, 있다 해도 당시의 부모님들은 굳이

차까지 태워 학원에 보낼 생각은 안 하셨다. 그러니 학교를 마치고 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약속된

순서였다. 당시 초등학교는 지금처럼 흔하지 않아 한 반의 학생 수가 60명대 후반에서 70명대를 웃돌았는데

지금 초등학교 세반 정도는 합쳐야 한 반, 한 학년에 20반까지 있었으니 대단한 규모였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한데 그래도 큰 탈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무사히 잘 살아낸 게 분명하다.     


해마다 새 학년이 되면 각 반의 담임선생님들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하교지도였다.

지금처럼 학교 앞으로 부모들이 기다리고 있던 때도 아니고, 같은 아파트 단지, 같은 동네 아이들을 찾기가

수월했던 시절도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버스 정류장으로 5개 정도는 훌쩍 넘는 거리를 걸어서 통학을

해야만 했으니까. 선생님은 아이들의 주소를 모아 비슷한 동네를 묶고, 하교 길을 짐작해 동선이 겹치는

학생들을 끼리끼리 모아 팀을 만드셨다.


4학년 때 우리 반은  집으로 가는 길을 함께 할 8개의 팀이 꾸려졌다. 수업을 마친 우리는 모두 운동장에 조별로 줄을 선다. 제일 먼저 집이 나오는 아이가 줄의 제일 앞. 집이 먼 순서, 그러니까 제일 뒤에 서는 아이의 집이

가장 멀다. 보통 한 조 당 6명, 많게는 10명이 넘기도 했는데 이 많은 학생들이 일렬로 교문을 나서는 모습이

실로 가관이었겠다.


나는 4조였고 우리 조는 총 8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8명 중 가장 마지막 조원. 우리 조에서 가장 집이 먼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우리 초등학교는 산 중턱 즈음에 있던 학교라 교문 앞 나란히 늘어선 6,7개의 문방구가 모두

고갯길에 있었다. 그 중간 즈음 골목길부터 4조의 하교 길이 시작된다. 4조 길로 들어서자마자 두 명의 멤버가 집을 찾아 들어간다. 바로 집 앞이 학교라니. 운이 좋은 녀석들이었다. 그 둘이 빠지면 여섯 명이 함께 꽤나 긴 길을 같이 가야 했다.


먼저 아주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야 했는데 너무 좁아 겨우 한 사람이 지나다니기도 힘든 길이었다.

그 길이 아니면 나는 5조 길로 가야 했는데 5조 길은 둘러가는 길이라 조금이라도 빠르게 집으로 갈 수 있는

4조로 배정되었다. 아주 좁은 골목길을 벗어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둘둘 짝을 지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중 두 명은 중간 정도 골목을 두 번 정도 바꿀 즈음 안녕을 해야 했다.


얼추 학교에서 15분은 걸어 나온 듯하다.

여기까진 별 재미가 없는 길이다. 나무도 없고, 집이래야 쇠로 만든 작은 녹슨 대문이 반쯤 열린 비슷비슷한

집들만 보여 난 이 길이 별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골목마다 널린 개똥이 문제였는데 함께 가는

아이 중 누구라도 이틀에 한번 꼴로 꼭 똥을 밟고야 말았던 것 같다. 밟은 아이는 밟았으니 연신 신발을 땅에 문질러 대느라 다른 친구들에 뒤쳐졌고, 밟지 않은 아이는 심심하던 차에 놀리는 재미에 법석을 부리다, 마치

개똥이 옮겨 묻기라도 하듯 펄쩍거리다 보면 우리의 대오는 무너진다.

그렇게 한바탕 시끄럽고 나면 골목을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나 놀리는 누구라도 언제 저 재수 없는 개똥을 밟을지 모르니 우리는 늘 골목길 아래 땅을 잘 살펴

지나야 했다. 여기까지 오면 절반은 왔다.


이제 차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 나온다. 양 쪽으로 작은 가게들이 심심찮게 나오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가면 시장이니 시장 초입 즈음되겠다. 여기서부턴 차조심이 우리 모두의 필수 덕목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최대한 길 가로 몸을 최대한 붙여 지나다니는 차로부터 몸을 피한다.

그러니 손을 잡고 갈 수도 삼삼오오 모여 갈 수도 없다.

아슬아슬 길을 지나 목욕탕이 보이면 시장 초입 4거리다. 이제 진짜 모두 헤어져야 한다.

남은 4명의 길이 또 갈린다. 한 명은 고개가 시작되는 위로, 한 명은 시장 안으로, 한 명은 길을 건너지 않고

다시 직진. 나는 길을 건너 반 정거장 정도 다시 내려가 길고도 긴 계단을 올라야 했다.     

 

가끔 친구 집에 들러 놀거나 특별한 임무가 있을 땐 우리 조의 골목길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어 연중행사였고, 자의로 5조나 6조 길을 골라 집을 가는 경우가 있었다. 

5조 길의 유혹은 학교 앞에서 살짝 벗어난 떡볶이 집과 뽑기 집 때문에 시작됐다. 5학년으로 진학하자 슬쩍

세상에 겁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는 혼자만의 달콤한 외식을 위해 한 달에 두어 번은

5조 길을 선택했다. 물론 주머니 사정이 허락해야 가능했지만.

그러나 6조 길은 달랐다. 4조의 골목길과 달리 처음부터 가게가 늘어선 복작거리는 길을 지나고 육교를 건너

버스와 차가 쌩쌩 달리는 대로를 한참 지나야 집에 도착할 수 있는 길이었다. 4조와 달리 위험하긴 했지만 좁지 않아 답답하지 않았고 늘어선 가게가 많아 뭐라도 들여다볼 재미가 꽤나 있었다.

완전히 겁이 없어진 6학년이 되자 난 4조 길을 접어두고 육교를 건너 6조 길로 하교를 했다.     

 

그렇게 6년을 이 길, 저 길 걸어 학교에 다녔다. 비도 오고 눈도 왔겠다. 덥기도 더웠고 춥기도 많이 추웠겠다.

그러나 참 별 탈 없이 잘 걸어 다녔다. 이렇게 탈 없이 잘 걸어 다닐 수 있었던 건 조별 하교 시스템 덕이 크다.

그 많은 학생이 한 반임에도 집에 갈 즈음이면 누가 결석을 했는지, 오늘은 누가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옆길로 샜는지, 그 이유가 뭔지 그냥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위치 추적기처럼 서로가 서로의 마지막 위치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 해도 추적이 가능하고, 최대한 모여 있는

순간까지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줄일 수 있으니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면서 보장까지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들 스스로 가장 적당한 ‘질서’를 만들어 지키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누가 누굴 반드시 챙겨라, 기억해라 주문하지 않았고 매뉴얼로 만들어

관리하지도 않았다. 그냥 같이 가다 보니 자연스레 좁은 길을 수월하게 벗어나려니 한 줄로, 좀 넓어진다 싶으면 삼삼오오, 그러다 다시 차가 지나다니는 길이 나오면 안전하게 한 줄로 길을 걷고 있었다.

누구 하나 알려주지 않았지만 알아서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 제 갈 길로 각자의 목적지까지 잘 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만의 원칙과 방법을 만들며 그 길을 걸으며 우리들의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오늘도 노란 차가 아이들을 실어 나른다. 아이들은 아이들을 만나러 학원에서 학원으로 움직인다.

걷지 않고 집으로 학교로 잘도 이동한다.

아마 지금도 이 시대에 맞게 아이들의 시간은 잘 채워지고 있을게다.

그렇게 믿고 싶다.             




이전 04화 늙음 앞에 무례하지 않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