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칼의 노래'
아버지의 냄새가 나는 책이 있습니다. 어렸을 땐 감흥이 없었지만, 나이 들수록 가까이하게 되는 책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서재에 꽂혀있어서 책등이 눈에 남아있는 그런 책들입니다. 저와는 인연이 없을 것 같던 책들이 이제 인연이 되어갑니다.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인지,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읽지 않던 아버지의 책들이 읽혀지고, 먹지 않던 아버지의 음식들이 생각나는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책이 김훈 작가님의 책입니다. 글을 읽으면 왠지 아버지의 향이 납니다. 내 것이 아닌 것 같던 존재가 마음에서 끌리는 느낌입니다. 여러 권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처음 읽은 건, ‘공터에서’라는 장편소설, 그다음은 ‘연필로 쓰기’라는 산문, 가장 최근에 읽은 건 ‘칼의 노래’입니다. 가끔 ‘자전거 여행’이라는 산문도 봅니다. 작가님의 산문을 조금 더 좋아합니다. 산문이 소설보다 읽기가 좀 더 쉬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소설은 밀도가 높아서, 읽다 보면 숨이 찰 때가 있습니다. 가끔 쉬어가며 읽어야 합니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순신 장군에 작가님 본인이 투영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작가님 스스로도 세상을 잠시 등지던 때에 이 책을 쓰셨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 문장이 많구나’라는 지점이 몇 군데 있습니다. 독자인 저도 제 상황에 빗대어 책을 읽게 됩니다. 몇 가지 문장이 눈에 남습니다.
“임금의 교서는 장려한 수사로 넘친다. 그 교서들은 무력한 조정의 고뇌와 슬픔을 남쪽 바다의 수군 진영에 전한다. 권력은 무력하기 때문에 사악할 수 있다.”
저도 가끔 임금이라고 부를 만한 위치에 있는 분으로부터 교서 비스무레한 걸 받는데요. 선조의 교서와 비슷한 면이 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문장도 눈에 띕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조정은 믿기 두려운 일을 믿지 않았다.”
쇠락하는 조직은 서로 비슷한 데가 많습니다.
아래는 제 상황과는 크게 상관없지만, 기억에 많이 남는 문장입니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되게 감탄했던 문장입니다. 실제로도 그렇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도 끼니는 항상 찾아옵니다. 어제 저녁 끼니를 잘 먹었다고, 오늘 끼니를 걸러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적도 오지 않고 명의 수군도 오지 않는 동안 백성들은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적이든 수군이든 백성에게는 한낱 귀찮은 존재일 뿐, 그냥 두면 알아서 잘 피어납니다.
혹시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아니면 저처럼 전에 읽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으시다면, 한 번 다시 펼쳐보십시오. 이번에는 잘 읽힐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