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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백무동, 어둠 속을 걷다

깊은 산, 부족했던 나!

by 명선우

어둠 속의 백무동


긴 연휴가 시작됐다. 서비스직 종사자인 나는 연휴 동안에도 일을 해야 했고, 추석 당일만 쉴 수 있었다. 귀성 차량으로 붐비는 도로 상황과 혼자 여행하는 여성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당일치기 또는 무박 일정을 계획했다. 내가 선택한 곳은 ‘지리산 백무동’이었다.

업무가 끝난 5일 야간, 11시 50분 동서울 출발 백무동행 야간버스를 예약했다. 긴 연휴에도 여분의 표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며 ‘운명’이라 여겼다. 지리산 산신 할머니를 뵈러 가는 여정이었다. 할머니가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할지라도, 할머니의 품으로 들어간다는 심정으로 설렘을 다스렸다. 백무동은 천왕봉을 오르는 산행자들에게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새벽에 가도 편의점 하나는 있겠지, 아니 터미널 대합실은 있겠지. 정말 지리산을 너무 얕잡아봤다.


막연한 계획


막연하게 그린 동선은 이랬다. 백무동에 새벽 도착해 2시간 대기한 뒤, 첫차를 타고 마천행 버스를 타거나 강변을 따라 걸으며 실상사를 가는 것. 날씨가 좋으면 인월까지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서울로 돌아오는 것. 인월발 동서울행 표도 미리 예매했다. 긴 연휴 동안 다들 귀성, 귀경표 매진에 발을 동동 구르는데 척척 표가 구해지니 그것 역시 ‘운명’이라 여겼다.

백무동행 버스는 서야 할 곳을 다 들렀건만 날아왔다. 도착 예정 시간보다 40분 빨리 도착했다. 낯선 여행자 4명 속에 내가 있었다. 한 남자분은 장터목 대피소를 들러 천왕봉을 오른다고 했다. 아주 마른 내 또래 여자분은 세석 대피소까지 천천히 올라 1박 후 천왕봉을 오른 뒤 장터목에서 2박 후 하산한다고 했다.

첫차가 다닐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터미널 앞 벤치를 비추는 어두운 조명 아래, 산모기에 뜯기며 첫차가 올 때까지 대기하자니 지루할 듯했다.

그래서 정말 예정에 없던, 마른 그녀의 세석 대피소 행을 해 뜰 때까지만 동행한다는 전제로 따라가게 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한신계곡’은 방대한 수량과 폭포로 이름난 코스였지만, 칠흑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산을 울리며 흐르는 물소리는 두려움과 공포의 소리였다. 낙엽과 습기를 머금은 등산로는 질척거리고 미끄러웠다. 겁도 없이 올라가는 나는 맨발에 트레킹용 여름샌들을 신고, 요가복을 입고 있었다. 밤의 무게를 견디며 어깨 위로 어둠을 매달고, 공포의 두근거림을 호흡 삼아 오르는 길.

2박 예정인 여자분은 깡마른 몸에 자기만 한 배낭을 지고 있었다. 엄청 무거워 보였다. 산 꼭대기에서 이틀을 지샐 시간만큼의 무게가 그녀에게 실려 있었다. 가족과 함께하지 않는 그녀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혼자 상상하기로 했다.

내가 앞서 걸으며 플래시로 그녀의 앞을 비춰주는 역할을 했다.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고, 그녀는 어둠 속 어딘가에 쓰고 온 모자와 스카프를 잃어버렸다. 짙은 어둠 때문에 되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위로 계속 전진할수록 경사는 높아지고 길은 좁고 험해졌다. 발끝이 짜르르한 칼날 같은 고통도 함께했다. 숨이 가쁘고 호흡이 거칠었다.

세석 대피소를 거의 앞에 두고 난 하산을 결정했다.

신발도 옷차림도 더 오르기엔 무리였다. 게다가 전화기가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불안을 키웠다. 혼자 하산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그 생각이 가장 무서웠다.


다시 내려오는 길


그렇게 나는 다시 어둠 속을 내려왔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샌들 속으로 작은 돌멩이들이 파고들었다. 이끼 낀 바위를 디딜 때면 발이 엇나가 주저앉기 일쑤였다. 오를 때는 두려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위협으로 다가왔다.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고, 질척한 낙엽에 미끄러지며, 나는 이름 모를 그녀가 내게 얼마나 든든한 의지였는지를 뼈저리게 되새겼다. 물어보나 마나 그녀 역시 나와 함께한 3시간 가까운 동행을 고마워했으리라.

어느 순간,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칠흑 같던 어둠이 물러나고 희뿌연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그제야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오층폭포였다. 어둠을 걷는 내내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물소리의 실체. 하얀 물줄기가 다섯 층을 타고 쏟아져 내렸다. 조금 더 내려가자 가내소폭포가 나타났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길 위에 홀로 서서, 나는 그 광경에 숨이 멎었다.

어둠 속에서 울부짖던 물소리는 이제 장엄한 교향곡이 되어 있었다. 쩌렁쩌렁 온 계곡을 휘감는 그 소리가 내 안의 어둡고 축축했던 것들을 쓸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 지친 몸이, 연휴 내내 일한 피로가, 그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깨달음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겁먹고 내려왔지만, 돌이켜보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샌들을 신고 산을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가복 차림으로도 괜찮을 거라 여겼다. 새벽에 도착하면 편의점이 있을 거라 믿었다. 첫차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있으면 될 거라 상상했다.

얼마나 안일한 상상이었는가.

지리산은 내가 ‘운명’이라 여겼던 모든 것들을 비웃듯, 나를 칠흑의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준비 없이 함부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산신 할머니를 뵙겠다던 그 경건한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를.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나는 제대로 된 등산화를 신고 올 것이다. 방한복을 챙기고, 헤드랜턴을 준비할 것이다. 무엇보다 산을 우습게 보지 않겠다고, 자연 앞에 겸손하겠다고 다짐했다.

추석 하루, 지리산 산신 할머니를 뵙고자 떠난 길은 예기치 못한 밤의 산행으로 바뀌었다. 칠흑의 어둠 속, 낯선 이와 함께 걸은 그 길 위에서 나는 두려움과 경외, 그리고 묘한 연대감을 동시에 느꼈다.

어쩌면 산신 할머니는 나를 만나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기대했던 방식이 아니라, 할머니만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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