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아이가 태어나기 전, 이사를 하면서
필요한 부분만 리모델링을 진행했었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
"발코니 공간은 절대 확장하지 말아라"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발코니가 이중창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고 말씀하시면서요.
밖의 창과 안의 창 사이에 형성된 공기층이
실내외의 열 교환을 효과적으로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덕분에 겨울에는 따뜻한 실내 공기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외부의 뜨거운 열기가 실내로 들어오는 것을 줄여줍니다.
그런데 저희 집 발코니는 단순한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부모님의 작은 식물원이 된 것입니다.
발코니의 작은 식물원 안,
초록의 녀석들이 고개를 빠꼼 내밀며
귀여운 싹을 틔웁니다.
축 처져 시들어가던 녀석들도
부모님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 여기 살아있다'라고
손을 번쩍 들고 흔들어댑니다.
발코니는 부모님의 또 다른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공간이어서,
저도 가끔 차 한 잔을 들고 바라보며
은은하게 불어오는 초록의 향기에 젖어들곤 합니다.
그 공간이 제게 전해주는 잔잔한 고요함은
내면의 결을 정돈하는 시간이 되어주었습니다.
고요함은 내면을 한 껏 채워주는 충만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저 발코니와 같은 공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발코니는 외부와 내부 사이를 구분하기도 하고
연결하기도 하는 공간이 되어주죠.
그리고 그 공간은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모습이 달라집니다.
바로 맞닿지 않는,
어느 정도의 적절한 거리감을 만들어 주기에
나를 좀 더 안전하게 돌볼 수 있는
케어존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소리가 존재합니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외부의 소리,
그리고 창 안에서 울리는 내면의 소리까지요.
외부와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아무 소리 없이 충만했던 고요함은 이내 깨지고
소란스러운 소음이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한 번은 공단에서 진행하는 교육에 갔다가
정신장애 청년 네 명을 만났습니다.
그들 모두 청소년기에 학교 폭력을 겪으며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내면이 산산조각 났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형체 없는 소리들이 마음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죽어라, 죽어라" 하고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지만,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릴 뿐이었습니다.
이 소리의 시작이 바깥이었는지 안쪽이었는지
더는 분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고 합니다.
고요함이 깨지면서 들리기 시작한
시끄러운 소리들은 잠을 이룰 수 없게 만들었고,
극도의 피로감과 예민함 속에서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한 청년은 환청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면
영원히 편히 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어머니가 매일같이
"네 잘못이 아니야,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다"라고 해주셨다고 해요.
어머니의 말씀은 청년의 삶에
기댈 말이 되었고 다시금 힘이 되어주었답니다.
이후 지속적인 상담을 시작하고,
약을 복용하며 이전보다는
나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낮에 들었던 누군가의 말의 의도가
잘 이해되지 않아, 적절한 '케어존'을 거치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마음속 깊이 들여 곱씹어 댑니다.
'내가 우스워 보였나?',
'왜 나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가?'
외부에서 들려왔던 소리는
내면에서 끊임없는 부정적인
질문과 답변들의 대화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결국 시커먼 쓴 뿌리를 내리고
꽈리를 틀어 한자리를 차지하고야 맙니다.
이제부터는 자동반사입니다.
외부의 소리가 들리면
내면의 쓴 뿌리에서
나를 해치는 악독한 말들을
스스럼없이 뿜어냅니다.
외부의 소음과 내면의 고통이 뒤섞인
혼란한 틈을 타,
그 소리들은 내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필터링(filtering)'
남편과 큰 아이가 계란찜을
좋아해 식사 때마다 종종 준비하곤 합니다.
좀 더 부드러운 식감을 내기 위해
망이 달린 틀에 계란을 걸러냅니다.
뭉쳐서 망을 통과하지 못한 잔여물은
물에 씻어 흘려보내고,
망을 통과한 내용물로만 계란찜을 만들죠.
그렇게 완성된 계란찜을 맛보는
남편과 큰 아이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집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경청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모든 소리를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망 밖에 남겨진 계란의 잔여물을
물에 씻어 흘려보냈듯,
소리들도 필터링을 거쳐
나를 재단하는 외부의 소리와 내부의 쓴 뿌리에서
쏟아내는 악독한 말들은 걸러내야 합니다.
걸러내고 다시 밖으로 흘려보내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저의 불안과 공황의 시작 또한
소리였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람의 변화가 외부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의미일 겁니다.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저는 저 스스로를 고쳐 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이 많아,
이러한 모습들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허락된 많은 경험들을 통해,
다른 사람은 어렵더라도
'나는 나를 고쳐 써 보자,
포기하지 말고 나를 고쳐 써 보자'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 안을 가득 채웠던 혼란스러운 소리들을
의도적으로 정리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요.
완벽할 수 없지만,
발코니에 살고 있는 초록이들의 생명력과
그들이 건네주는 은은하고 잔잔한 고요함이
저를 치유하는 동시에 마음의 공간 또한
회복시키는 것을 느낍니다.
외부와 내부 사이에 공간을 만들고
필터링의 질문들을 문지기로 세워야 합니다.
'이 소리가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소리인가?'
'이 소리가 나를 성장시키는 소리인가?'
'이 소리가 나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이루어 줄 소리인가?'
이 질문에 납득이 되는 말들만 마음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자동반사되는
좋은 소리들을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어린 벗에게
-나태주 시인-
그렇게 너무 많이
안 예뻐도 된다
그렇게 꼭 잘하려고만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모습 그대로 너는
충분히 예쁘고
가끔은 실수하고 서툴러도 너는
사랑스런 사람이란다
지금 그래도
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라
지금 모습 그대로 있어도
너는 가득하고 좋은 사람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