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녹이는 '언력(言力)'

by 겨울나기 이코치

'말 한마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 누구나 다 아는 속담이지요.

국민학교 시절 수업 시간에 이런저런 속담들을 배우며, 그 속담이 지닌 의미들을 별생각 없이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도 세상의 이치를 마냥 모르는 것은 아니었기에 '무슨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나?' 하며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천 냥을 현실적인 돈의 가치로만 환산했을 때는 어린 시절의 저처럼 생각하게 되지만, 세월은 제게 천 냥이라는 가치가 다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코치라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의 혹독한 겨울을 나며

간절히 기다리는 '말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쉬어가도 된다는 말을 해준 사람은 코치님이 처음이에요."


그 말 한마디에 숨이 쉬어졌다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말 한마디가 천냥 이상의 가치를 두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세상


20대에 '젊음의 탄생'이라는 책을 접하며 이제는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성경 다음으로 제가 가장 많이 필사한 내용이 선생님의 책들일 겁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력을 가지고 계실까 놀라워하며 닮고 싶은 마음에 필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거시기 머시기'라는 책을 읽으며 필사를 하다가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word' -> 'world'


한 글자만 고쳐 쓰면

언어가 세계가

된다는 의미였죠.


『언어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창조적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절대 변화가 불가능한 자연법칙이 아닌,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언어의 세계 속에서 나의 삶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중력에 구속받는 자연계에서 벗어나, 언어라는 또 하나의 세계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일기를 쓰고 필사를 하며, 세상과 나누고 싶던 이야기를 글로 작성하면서 저는 매일 조금씩 회복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사는 내내 찾아오게 되는 겨울을 제대로 나고,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은 언어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세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부서지기 쉬운 마음의 자리마다 소란스러운 소리들에 매여,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답을 쫓으며 더 깊은 혼란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소란과 혼란을 잠재웠던 것은 하늘이 선물로 준 언어의 세계였습니다.


그 세계에서 저는 제 자신을 살려두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를 고쳐쓰기로 마음먹으며 제 글의 세계도 방향을 잡고 닻을 올렸습니다.


언어의 세계에는 솔직한 제가 있었고, 삶을 돌아보며 소망하는 바람들이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고통과 절망의 상황 속에 뿌려진 눈물의 흔적들이 성숙과 지혜라는 이름으로 자라나고 있음을 보기도 했고요.


이어령 선생님은 책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셨습니다.


"언어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자기 인생과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고 말하기의 핵심입니다. 인생은 수능시험이 아니에요. 채점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문제를 내고 여러분이 바로 그 답을 내야 해요. 그 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여러분밖에는 알 수 없어요."



나의 세계를 채우는 언어들


나는 자신감이 나 스스로를 믿는 마음임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실수를 통해 지혜와 교훈을 찾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잠시 흔들려도 다시 중심축을 잡고 나의 길을 걸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줄 알며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나무만이 아니라 숲을 볼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람들의 겉모습보다 내면에 지닌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환경에 대한 관점과 태도가 더 중요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상관없이 나는 나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지금의 실수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음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주위의 사람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배려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나에 대한 용서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실패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지금의 노력이 절대 헛되지 않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내게 언제고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격려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주어진 하루에 감사를 찾으며 감사의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제게 들려주고 싶은 언어들을 이렇게 쭉 적어 내려가 봅니다. 그러다 그 문장에 좀 더 마음을 실어 연결해 나가기도 하고요. 공황이 찾아와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졌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언어의 세계로 저를 초대하는 일이 삶의 루틴이였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말 한마디"를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는지를요. 그래서 저는 언어를 통해 제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제가 만들어 둔 언어의 세계 안에는 겨울을 녹이는 언력(言力)이 있습니다.


사람이 싫어지고, 상처가 아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급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요.


당장 그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오라고 다그치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당신이 만들 수 있는 또 하나인 언어의 세상만큼은, 당신을 살피고 달래며 다독이는 소소하지만 온기 있는 언어들로 채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매일 조금씩 온기 있는 말들로 스스로를 살려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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